치술령 망부석 위치 진위 여부 관련 심포지엄 김대원 시인의 주장
머리말
나라에서 문화재를 지정하는 목표는 국민의식 개조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국가관과 역사관을 확립시키고 애국애족의 국민정서생활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 문화재나 문화재 자료를 통하여 과거사를 이해시키고 그 과거사를 통하여 오늘 날 생존하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고 미래의 후손에게 정의로운 사회와 민족문화 창달에 이바지하여 국가발전에 유익한 영향을 받도록 하는데 있다. 모름지기 향토사학가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사리사욕 사견을 버려야 한다. 어떤 도청소재지의 경계나 지역 간의 경계 때문에 문화재를 지정하는 근본 방향과 목표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문화재가 향토색 때문에 잘못 지정되어서도 안 되고 지역이권 때문에 문화재 자체의 이상과 가치를 훼손하게 해서도 안 된다. 치술령의 경우 경상도남북 도경계를 초월하여 “치술령문화관광 특구”로 지정하여 남북이 함께 박제상의 정기를 기려야 할 것이다. 남북 경계선 때문에 본래부터 주어진 망부석 위치 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어느 곳이 진정 미래의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고 관광객으로 하여끔 보다 효과적으로 인식시키고 감명을 주는가에 그 가치와 무게를 두어야 한다. 김대원
치술령(鵄述嶺)과 망부석(望夫石) 소개
치술령은 울산시 두동면 칠조. 만화리 동쪽과 경주시 외동읍 석계. 녹동리 서쪽의 높이 765 m의 박제상가의 전설이 담겨진 산이다. 그 정상은 외동읍 녹동 산161-1번지로 되어 있고 그 바로 남동쪽 아래 녹동 산 161번지에는 석계초등학교 교가로 지정된 망부석 바위가 (높이 약 18.85M 가로 11,16 M) 동해 바다를 바로 바라보고 있고
정상 북쪽 약 100 M 아래에는 북쪽을 향해 모녀가 베를 짰다는 베틀바위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저 있다. = 앞머리 큰 바위높이:7 M 중간 몸체 5 M 뒷 앉음대 바위 2,5 M 이다' 정상 서쪽 약 300 M 아랫쪽에는 세효녀 아가바위가 한곳에서 갈라저 세개가 있고 따로 조그마한 문량이의 바위가 있다. 이들 바위는 남서편 국수봉 은을암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장 높은 바위가 4.20 M 이다 . 이 바위에는 울산시에서 천연석을 [망부석]이라 인위적으로 각인해 두고 있다. 세 효녀바위를 망부석이라 지정한 그 근거를 1934년도의 일제시대 만들어진 울산읍지에 두고 있다 .
이 읍지가 망부석으로 규정한 사실이 얼마나 엉터리 이냐 하면.
“ 은을암 재 망부석동십리 속전 박제상부인혼조비입암혈간금암혈수연적」
「隱乙岩 在 望夫石東十里 俗傳 朴堤上夫人魂鳥飛入岩穴間今岩穴水涓滴」”
남 서쪽 십리 국수봉 아래에 있는 <은을암>을 모화나 호계 쪽이 될 수밖에 없는 동십리에 있다고 위와 같이 밝혀놓고 있다. 곧 이 엉터리 내용을 바로 잡기위해 한권의 책을 내었으니 그 책이 바로 [서라벌의 망부석 아직도 울음운다.] 이다.
망부석이 치술령 정상에 있음은 이미 울산읍지가 만들어 지기 전 470여 년 전에
김종직(金宗直)의 시(詩)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치술령두망일본점천경해무애안양인거시단요수생여사여음모단장별이사생녕유상견시호천편화무창석열기천재간공벽
(鵄述嶺頭望日本粘天鯨海無涯岸良人擧示但搖手生歟死歟音耗斷長別離死生寧有相見時呼天便化武昌石烈氣千載干空碧)
鵄述嶺頭望日本
분명 치술령 <중턱이 아닌> 머리에서 일본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또 유호인(兪好仁) 의 시(詩)에서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고신일사답군은만리부상한절존치술봉두삼장석수운유대망부혼
(孤臣一死答君恩萬里扶桑寒節尊鵄述峰頭三長石愁雲猶帶望夫魂)
鵄述峰頭三丈石 치술봉 머리에 3장(30자)높이의 바위를 말하니
그 바위역시 치술령 <중턱의 바위가 아닌 >정상의 바위를 말한다.
그런데도 울산시에서 바위가 세 개 나란히 있는 세 효녀(공주)아기바위를 망부석이라 고집하는 것은 아마도 1934년도 울산 읍지의 내용 때문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1934년도의 울산 읍지의 기록을 보면
「망부석재치술령상신라눌지왕이년박제상사어왜국기처금씨부승애원졸이녀상차산망왜국통곡이사신화위석혼위조혹운장녀아기삼여아경개곡진이사이녀아영독부사왈아약종순수매아모급자호우수양아제문량호귀이맹금망부석좌우유이석시이녀신화운일운부인지기석」
「望夫石在鵄述嶺上新羅訥祗王二年朴堤上死於倭國其妻金氏不勝哀怨卒二女上此山望倭國痛哭而死身化爲石魂爲鳥或云長女阿奇三女阿慶皆哭盡而死二女阿榮獨不死曰我若從殉誰埋我母及姉乎又誰養我弟文良乎歸而盲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영호박사님께 올립니다.
치술령의 망부석은 저희 조상님들이 대대로 후손들에게 알려오신 박제상 가의 충효의열 전설이 얽혀있는 전설의 바위입니다.
이 바위의 위치를 바로 아시기 위해 사학자님께서는 1971년 치술령을 답사 했습니다.
1971년 치술령을 답사하시기 그 이전 옛 신라시대 그때부터 이미 망부석(望夫石)위치는 정해져있었습니다.
망부석은 치술령 바로 정상 10 여미터 아래에 높이 서서 남편이 떠나가신 율포 앞바다 (동해)를 내려다 바라보고 있는 바위 입니다. 정확하게 말씀 올린다면 <경상북도 경주 외동읍 녹동리 산 161~1 번지> 높이18 미터 이상의 높은 바위입니다 . 이 바위를 망부석이라 해 왔으며 그 망부석을 해방 후 즉시그때에 양철 판으로 치술령의 [망부석]이라는 안내간판문을 새겨 세워둔 것을 본인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영호 박사님께서는 1970년대 초에 치술령에 올라가 보아도 치술령 어느 곳에서도 지정된 망부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 주장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박사님 말씀대로 만약 지정된 망부석이 없었다고 합시다 . 그렇다고 박제상의 정기를 기린다고 하시면서 어찌 치술령 서편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바위,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효녀아기바위를 <제1망부석>이라 칭하고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진짜 망부석을 <제2망부석>이라 한 그 사실을 결코 이해 할 수 없아 오며 또 특히 사학자로서 항일 정서가 잠겨있는 망부석 위치를 처음으로 정하면서 동해를 눈 아래로 바라보고 있는 정상동편의 망부석을 제1로 보지 않고 서쪽에 위치한 두동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 바위를 제일 바위로 정했다고 한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지금 현대인과 우리의 후예를 위하여 은을암을 비롯하여 망부석 지정을 항일 정서를 위해 선양하는 것이라면 그 근거자료의 선택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어찌 일제 통치 하에 만들어진 1934년도 울산읍지의 고증을 지금 현 망부석 고증자료로 택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때 일본은 우리나라 명산대천의 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맥을 찾아 쇠말뚝을 박거나 산맥을 짤라 도로를 낸 사실을 아신다면 당시의 울산읍지가 우리나라 정기를 망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읍지임을 어찌 짐작하지 못하셨을까요?
이 자료를 기용한 것은 저들의 함정에 깊이 빠진 것으로 저는 봅니다. 망부석은 본래 하나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따르니까 본래 없던 망부석을 서편 중턱에 새로 하나 더 만드신 결과가 된 것이 아닌지 심히 염려됩니다.
앞으로 저가 밝히겠습니다만 1934년도 울산읍지 망부석 고증이나 은을암 고증이 엉터리임을 밝혀질 것입니다. 어떠한 변명을 하셔도 선생께서 지정해 만드신 현재의 제1망부석은 박제상의 전설 내용을 엉터리로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옛 부터 전해오는 본래의 치술령 망부석의 진의를 완전히 흐려놓고 있습니다.
혹시 소인이 추측컨대 울산시에서 경상남북도의 경계를 의식하여 문화재를 지정하려하다 보니 고의로 울산 쪽 서편 두동면 만화리 소재의 돌에다 망부석이라는 글도 조각하면서까지 제1 망부석으로 만드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치술령도 망부석도 도계를 초월하여 신라인의 산천이요 바위입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그 위치에 존속하는 바위라야 박제상가의 정기를 앙양하는데 실감이 나지 거짓 바위로는 오히려 지탄만 받게 됩니다. 이에 자세하게 그 사실을 알려 올립니다.
**************************
경주와 울산 일대에 사시는 주민은 물론이요 내 고장을 가꾸어 가는 향토사학자 여러분에게 삼가 이 책 한 권을 올리옵니다.
치술령의 망부석에 관한 필자의 소견과 경주시와 외동 읍민의 정서를 밝히고자 합니다.
치술령 망부석에 관한 한 필자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망부석은 본래의 위치에 그 이름 그대로 있어야 하고, 망부석은 언제까지나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어야만 이 역사 속에 참가치가 존속된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망부석은
1. 동해는 물론 율포가 가장 잘 보이는데 있어야 하고
2. 일본을 응징하며 위엄을 갖추고 있는 쪽의 바위라야 하며
3. 누가 보아도 머리가 숙여질 수 있는 웅장함이 있어야 하며
4. 박제상가(朴堤上家)의 충효의열 4절(忠孝義烈四節)의 정기가 서려있어야 하며
5. 우리의 극일(克日) 정서에 역행하는 일본인의 손때가 묻은 자료를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필자는 천마봉 줄기 아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그 망부석을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충효의열(忠孝義烈)은 바로 저의 신앙이며 이상이요 꿈입니다. 그것이 저의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었으며 국가관이 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지금껏 부정과 결탁한 일이 없으며, 어느 곳 어디에서나 잘못된 것은 끝끝내 바로 잡고야마는 결백한 생활을 해 왔습니다. 현실의 유혹에 타협하여 참이 아닌 것을 용납해 준 일이 쉰이 넘는 이 나이에까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경주쪽 녹동 산 161번지에 있는 망부석을 배제(排除)하고 울산쪽 만화리에 소재해 있는「세 효녀아기(阿奇)바위」를 망부석이라 주장하는 최근 울산시의 처사는 양식 있는 시민으로서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이 판단하여 참이 아니라는 결정을 한 이상 어쩔 수 없이 수백만 원의 自費를 들여 그 책을 낼 것을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겁도 없이 외치는 필자의 소리에 일침을 가하여 필자를 자중하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민초시인이지만 잘못된 점이 있다면 어떠한 경우이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 훗날 내 후손에게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외동 석계 녹동에 살고 계시는 주민들은 망부석 전설의 내용에 대해서는 약간의 변설이 있습니다만, 경주 녹동 산 161-1번지의 그 망부석 바위가 바로 진짜 망부석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부터 울산 쪽 만화리에 망부석이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은 그 책을 보시면 견해 차가 다소 있다 해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설혹 온당치 못한 표현이 있다 해도 그리고 좀 목소리가 거칠고 높고 강하다 해도 필자의 고향을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해해 주십시오.
필자는 일찍이 저를 키워주신 분으로 이미 고인이 되신 안응묵(安應默:91세) 옹과 안병옥 선생 부자(父子) 분의 향토 사랑하는 그 심정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써 망부석의 진위(眞僞)를 밝혀야만 했었습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당부 올리옵니다. 지금까지 경향 각지에서 각계각층의 사학자들이 밝힌 자료에 대해 제가 결코 반박을 하고자 함은 절대로 아닙니다. 성격상 제가 목소리를 높이고 감정에 사로잡혀 격한 소리를 하더라도 양해를 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저는 그 책을 발간함에 망부석을 치술령 서편 중턱 울산시 두동면 만화리에 소재하는 4m 20cm 높이의 효녀아기바위를 두고서 망부석이라 주장하여 문화재로 지정케 하신 분들에게 이 글을 올리고, 더불어 저에게 조언을 해주실 것을 바라며, 특히 당시 김태호 국회의원님, 동아대학교 박물관장 심봉근 교수님, 그리고 사학자 정영호· 최익호· 황수영 박사님, 지방유지 제위(諸位)님께서도 어떻게 무엇에 근거하여 그런 주장을 하셨는지, 그것이 못내 궁금할 뿐이옵니다.
1934년도판『울산읍지』는 보았습니다만, 그 밖의 다른 자료가 있다면 저도 읽고 싶습니다. 꼭 부탁 올립니다.
사학자 정영호 박사님! .
사학자님께서 울산광역시 문화제 제1호로 지정하신 치술령 정상 남서쪽 300미터 하의 울산시 두동면 만화리 뒷산의 그 바위는 망부석이 아닙니다. 처녀바위라고도 하고 세 공주바위라고도 하는 바위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서쪽 국수봉을 바라보고 있는 이작은 공주바위를 제1망부석이라 칭하고 그 돌에다 망부석이라는 글을 각인까지 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사학자님께서 저술하신 (충북 교원대학 박물관에 비치한) 치산서원 및 치술령 망부석 관련 자료 69쪽에 의하면 치술령 유적 (지도4 ,사진 28~39참조)
<<치술령은 월성군과 울주군계인 동시에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이루고 있다. 흔희 월성군에서 울주 쪽으로 길게 뻗은 준령을 치술령이라고 하나 사실은 역사적으로 말할 때 標高 765m의 정상부를 치술령이라 하게된다 이곳에는 망부석이 두 곳에 있고 神母祠堂 자리가 남아 있으며 망부천도 깨끗이 남아 있다
① 제1望夫石
두동면 만화리에서 속해있는 망부석으로서 치술령의 정상부에 위치하지는 않았으나 경주에서 서남산 밑으로 향하여 봉계리를 거쳐 월평리를 경유하여 치술령으로 올라가자면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동해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이 제1望夫石이다.
여기서 望夫石을 제1 제2라고 칭하는 것은 편의상 필자가 부친 명칭인데 처음에는 金交夫人이 이 제1망부석에서 동해를 바라보다가 좀더 동해를 가깝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을 찾아 頂上 넘어 제일 망부석에 올라갔던 곳으로 생각된다.
제1望夫石은 萬和里에서 올라가면 쉽게 갈 수 있어서 대게 등산객은 이 길을 택하는데 이 암벽에는 <<망부석>>이란 刻字가 있다. 이 망부석을 옆의 큼직한 돌과 함께 베틀바위라고도 하는데 이망부석 자체의 규모는 7. 3m x4. 2m, 높이 4. 75m 이다 화강암의 평범한 암반인데 이 바위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맑은 날에는 동해가 굽어보인다. >>
라고 기술했습니다.
여기서 분명 박사님은 이 돌에 <망부석이란 각자(刻字)가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해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라고 했습니다.
실재 이 자리에서 한번 살펴보십시오.
동해가 굽어보입니까?
이 바위가 바라보는 방향이 동해 쪽입니까?
남서쪽 은을암자가 보이는 국수봉입니까?
국수봉이지요. 이 바위가 365일 서서 바라보는 쪽은 동해편이 아니라 남서편 국수봉 산천입니다. 여기서 동해가 어디 보여요?!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와 뒤돌아서서 치술령 등선 동남쪽을 바라보면 그 치술령 산 낮은 등선 저 넘어 울산 태화강과 울산장생포 앞바다가 겨우 보이지요! 그곳도 동해라 봅니까? 울산 부산 진주 서귀포가 남해 아닙니까? 그곳에서 보이는 바다는 동해 율포도 방어진 유포도 아닌 울산 태화강과 울산 장생포 앞바다 즉 남동해 일부입니다.
박제상 부인이 자기 남편이 장생포 앞바다 남해로 온다고 기다렸습니까? 역사이래로 장생포 앞바다를 율포라 한 예도 있습니까? 박제상 부인이 바라본 바다는 남편이 일본으로 떠난 도왜처인 율포 앞바다 양남 진리마을 앞바다 동해입니다.
남편이 돌아오는 그 길이 장생포 앞 바다가 아닌 곧 남편이 떠나간 율포앞바다인데 소위 제1망부석이라 지정한 그곳에서 동해 바다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동해 율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본래 망부석은
박사님께서 제2망부석이라 지정한 그 망부석만 진짜 망부석입니다. 765미터 치술령 정상 동남쪽 약 15~20미터 하 높이 18미터80센티가 되는 높은 그 바위가 망부석입니다.
최근 지번이 변경 된지는 모르지만 소인이 확인할 당시엔 녹동산 161-1 번지 그 바위입니다.
그 망부석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보아야만 진리마을 앞 바다 동해가 훤히 보입니다.
남편이 떠나간 동해 그 율포 앞바다가 보입니다.
그곳이 보이는 쪽의 바위가 망부석이 됩니다.
이 망부석에서는 특히 새벽에 해뜨기 직전에 토함산 전체자락을 바라보면 그 산 넘어 동해 전체가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아마도 기함(奇喊)을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몸이 변해 망부석이 되었단 전설은 바로 투신자살한 그 현장의 바위를 칭하는 것이지 다시 말해 죽어야 혼은 새가되어 날아가고 몸은 변하여 망부석이 되지 제1망부석이라 칭한 그 바위는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4미터 23센티 높이의 바위입니다. .
내가 뛰어 내려보니 어쩌다 다쳤으면 다쳤지 사람 죽을 높이가 아닙니다.
그다음 망부석이라는 刻字의 진위입니다.
그리고 저가 70년대 이전에 수없이 그 바위에 갔을 때는 그 바위에 망부석이란 글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80년 중후반에 갔을 때는 그 바위에 망부석이라는 글이 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정영호사가님이 스스로 말하기를 <이 암벽에는 <<망부석>>이란 刻字가 있다>고 분명하게 밝혔는데
같은 책 78쪽을 읽어보면
<< 8. 募集遺物(사진 60. 61참조)
필자가 朴堤上과 金交夫人에 관계된 유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치술령에 올라가 현지를 답사한 것은 1971년 7월의 일이다 .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치술령의 정확한 위치와 특히 神母祠지의 祠宇자리가 어디인지 또 망부석을 정확하게 지적한 일은 없었다. >>하고 밝히고 있습니다.
만약 이 암벽에 <<망부석>>이란 刻字가 있었다 하면 1971년도엔 망부석을 정확하게 지정한 곳이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현장에 망부석이라는 글자가 돌에 새겨져 있는데? 어찌 돌에 망부석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정확하게 지정한 곳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당시 아니 그 이전 1960년도 아니 그 이전부터 치술령 동쪽 그 바위에는 석계초등학교에서 교가를 지을 때 흰 양철판에다 흑은색 페인트글씨로 망부석 내역과 그 전설을 기록하여 두었던 것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정 교수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 다시 그곳에 가서 그 주변을 살펴보면 그 당시 양철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안내판을 울산시에서 뽑아 던져버린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망부석은 해방 즉시 외동읍 석계초동학교 설립 시 교가 제정 당시에 [작사 김영식, 작곡 권태호 ]선생께서 교가로 지정 하셨고 그때에 양철 판으로 망부석이라는 안내판을 세워둔 것을 본인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사님께서는 정확하게 지정 하여 간판까지 만들어 놓았는데도 찾아보아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문서상에 정리된 것이 없다고 하여 그렇게 말씀 하신 것 아닐가? 짐작이 됩니다.
그리고 분명 처녀바위 암벽에는 <<<망부석>>이란 刻字가 있었다. >고 앞서 그의 고증 69쪽에는 밝혔는데 78쪽에는 <1971년도 7월에는 망부석을 정확하게 지정한 곳이 없었다. >고 술회하였습니다. 이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
여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 냐 하면 자 보십시오.
이 글에서 울산시에서 <망부석 아닌 돌을 망부석으로 만들기 위해 새긴 것 >을 정영호박사는 스스로 是認하게 하는 좋은 자료인 것입니다.
그리고 정영호 박사께서 소위망부천이라고 한 그 샘은 옹달샘도 아니고 그냥 진흑 뻘에 물이 고인 곳입니다. 날씨가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말라버리는 뻘입니다. 그런데 암벽을 파고 나무를 걸치고 하여 최근에 샘처럼 만들었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구태여 망부샘을 만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울산쪽 주장에 의하면 저들은 김교부인이 만화리 친정집에 있다가 날마다 이 높은 령으로 아이들 넷을 데리고 올라와 남편을 기다리다 도로 집에 가서 자고 그 이튿날 또 올라오고 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랬다면 구태여 望夫泉을 만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친정에서 날마다 올라왔다고 하는데 . . . . . . . .
그렇게 주장하려니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면 그 김교부인이 이곳에 유배된 것을 은연중 짐작하게 되니까 이곳에서 밤낮 기다렸다고 하려니까 식수문제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녹동 석계쪽에는 움막을 지었던 터와 식수를 해결했던 샘까지 모두 있으니 . . . . 어떻게 하던 간 이들은 그 환경을 석계 녹동쪽 참샘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려니까 그와같은 무리한 행적의 흔적 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돌에다 망부석이라 새기는 것이나 진흙 뻘에 물기가 좀 있다하여 그곳을 파서 옹달샘을 만든 후 망부천이라 이름을 달아준 것이나 이는 史家的 양심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그런 일을 한 것 아닐 까요?
박제상의 행적과 그 부인의 행적을 경주 외동 방향에는 그 흔적을 죽 연결지어 찾을 수가 있습니다.
경주 반월성에서 남산 배반동 앞개울 망덕사 앞의 장사와 벌지지와 그리고 입실에서 양남진리마을로 가는 등뒤골 堤길. 그 젯 길에서 남편이 떠난 율포 진리마을. 진리마을의 동메 그리고 되돌아오든 박제상의 말이 입실로 넘어 북토 아랫마을에 와서 죽게되니 그곳에서 박제상 말 무덤 즉 馬稜이 있게 되고 그 말이 온 길을 더듬어보면 덕동을 지나 제내리의 상석마을로 갔지 않았나 생각은 합니다만 오리무중이고 다만 김교부인의 친정집으로 질러가는 그 길이 바로 북토에서 제내 제내에서 바탕골 명대마을. 그곳에서 내남면 월산으로 경남 봉계로 연결되는 옛길이 열려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배지가 치술령으로 정해 졌다면 어디로 치술령으로 가겠어요? 이는 말 하나마나 박제상 부인이 이곳 치술령 정상에 올려면 가까운 외동 입실 구어 석계 녹동쪽으로 올라와서 이 참샘터로 오지 구태여 그 멀고 먼 두배의 길이 더 되고 힘든 봉계가는 그 길을 걸어서 치술령에 가겠습니까?
경주에서 용산 월평 봉계까지 가는 시간이면 경주에서 입실로 구어로 석계로 녹동으로 질러오면 치술령에 정상에 도달 했을 것입니다 .
그리고 정영호박사님은 천번만번 양보해서 없었던 망부석을 하나 새로 만들려면 새로 만든 이 망부석을 어찌 제 1망부석으로 칭하고 있으며 또 울산시에서 문화제를 지정함에 있어도 여기 표지판에 사실 그대로 <제1망부석은 치술령 정상 동남쪽 약 15미터 하에 있는 높이 18m80cm의 바위가 있다> 라고 그 본 망부석을 안내해 주어야지 안 그렇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와서 보아도 그 진실성을 가름하지. . . . .
그리고 울산시에서도 그렇지 이런 엉터리를 망부석이라 하고 진짜 망부석은 내려가는 길을 당시에는 폐쇄하듯 둑을 높이 쌓았고 뿐만 아니라 화살표 표지판을 만들어 마치 이 가짜 바위를 진짜 망부석인 것처럼 정상 남서쪽 등산로를 가르키게 한다는 것은 실로울산시민이나 경주시민을 우롱하고 진실을 망가뜨리며 결국 역사 앞에 큰 죄를 짓고 후손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결과가 됩니다. 소인의 이야기가 잘못 되었습니까?
저는 저가 태어난 고향 산천이고 저가 바라보며 자랐던 망부석이고 그래도 저가 詩含神霧를 외치는 시인으로 이런 부당한 처사를 그냥보고 있을 수 없어서 이렇게 호소를 합니다.
그리고 울산시에서도 충효의열의 4대정신을 기리고 항일정서를 기리기 위해 은을암을 비롯하여 망부석을 지정하여 선양하는 것이라면 그 근거자료의 선택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어찌 일제 통치 하에 만들어진 1934년도 울산읍지의 고증을 지금 현 망부석 고증자료로 택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때 일본은 우리나라 명산대천의 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맥을 찾아 쇠말뚝을 박거나 산맥을 짤라 도로를 낸 사실을 아신다면 당시의 울산읍지가 우리나라 정기를 망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읍지임을 어찌 짐작하지 못하셨을까요?
이 자료를 기용한 것은 저들의 함정에 깊이 빠진 것입니다.
망부석은 본래 하나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따르니까 본래 없던 망부석을 서편 중턱에 새로 하나 더 만드신 결과가 된 것이 아닌지 심히 염려됩니다.
앞으로 저가 서책으로 밝히겠습니다만 1934년도 울산읍지 망부석 고증이나 은을암 고증이 엉터리임을 밝혀질 것입니다.
어떠한 변명을 하셔도 선생께서 지정해 만드신 현재의 제1망부석은 박제상의 전설 내용을 엉터리로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옛 부터 전해오는 본래의 치술령 망부석의 진의를 완전히 흐려놓고 있습니다.
혹시 소인이 추측컨대 울산시에서 경상남북도의 도경계를 의식하여 문화재를 지정하려하다 보니 고의로 울산 쪽 서편 두동면 만화리 소재의 돌에다 망부석이라는 글도 조각하면서까지 제1 망부석으로 만드신 게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치술령도 망부석도 도계(道界)를 초월하여 신라인의 산천이요 바위입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그 위치에 존속하는 바위라야 박제상가의 정기를 앙양하는데 실감이 나지 거짓 바위로는 오히려 지탄만 받게 됩니다.
저는 이 책을 발간함에 망부석을 치술령 서편 중턱 울산시 두동면 만화리에 소재하는 4m 20cm 높이의 효녀아기바위를 두고서 망부석이라 주장하여 문화재로 지정케 하신 분들에게 이 글을 올리고, 더불어 저에게 조언을 해주실 것을 바라며, 특히 당시 김태호 국회의원님, 동아대학교 박물관장 심봉근 교수님, 그리고 사학자 정영호· 최익호· 황수영 박사님, 지방유지 제위(諸位)님께서도 어떻게 무엇에 근거하여 그런 주장을 하셨는지, 그것이 못내 궁금할 뿐이옵니다.
1934년도판『울산읍지』는 보았습니다만, 그 밖의 다른 자료가 있다면 저도 읽고 싶습니다.
꼭 부탁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지도편달 바라옵니다.
본론(本論)
앞에 서언에서도 밝힌바 울산시에서 천연석을 [망부석]이라 인위적으로 각인하고 세 효녀바위를 망부석이라 지정한 그 근거를 1934년도의 일제시대 만들어진 울산읍지에 두고 있다.
이 읍지가 망부석으로 규정한 사실이 얼마나 엉터리 이냐 하면 앞에서도 밝힌바. 남남 서쪽 십리 국수봉 아래에 있는 <은을암>을 모화나 호계 쪽이 될 수밖에 없는 동십리에 있다고 밝혀 놓았다 . 곧 이를 밝히기 위해 한권의 책을 낸 것이 오늘 참석자에게 올리는 [서러벌의 망부석 아직도 울음운다] 이다.
1934년도의울산 읍지의 기록을 보면
「望夫石在 *鵄述嶺上新羅訥祗王二年朴堤上死於倭國其妻金氏不勝哀怨卒二女上此山望倭國痛哭而死身化爲石魂爲鳥或云長女阿奇三女阿慶皆哭盡而死二女阿榮獨不死曰我若從殉誰埋我母及姉乎又誰養我弟文良乎歸而盲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치=소리개 치(鵄)
주의 : 위의 기록은 일제 강점시절 울산읍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정영호 역사학자등 사학자님께서 서편하늘 두동면 국수봉을 바라보고 있는 치술령 정상 300미터 하 중턱의 조거마한 바위 셋 중 하나에 망부석이라 각인케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울산 읍지대로라면 중간의 바위를 망부석이라 해야 하는데 이중 가장 위쪽(동쪽)에 있는 바위를 골라 왜? 망부석이라 각인토록 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소인의 책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일제치하에서 일본이 한국의 충효의열의 박제상 정기와 그 전설을 망치기 위해 조작된 것임이 판명되리라.
치술령(鵄述嶺)의 망부석(望夫石)
치술령(鵄述嶺)과 치술신모(鵄述神母)
1. 치술령(鵄述嶺)산 명칭의 유래
신라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이 늦게야 왕자를 얻어 눌지(訥祗 376년생?)라 이름하고 크게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던 차 13대 미추왕(味鄒王262~284)의 조카 실성(實聖 ? 재위 402~417)을 보니 그 인물됨이 범상치 아니함에 차후(此後)에 필히 귀히 얻은 자기의 왕자 눌지(訥祗 376-재위 417~458〕를 위협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여러 날 여러 해를 혼자서 속 태우다 심사숙고 끝에 이웃 고구려와 화친을 맺는 조건으로 실성을 고구려국 볼모로 보냈다. 이렇게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국에 보낸 후에 내물왕은 차자 보해(寶海378년)와 삼남 미해(美海380)와 사남*?*( )을 낳으셨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십수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때도 아직은 눌지(訥祗)가 국정을 돌볼 만큼 성숙하지 못한 터에 그만 내물왕은 중병을 얻어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물왕이 서거하자 국인(國人)은 다함께 의논하여 한 입으로 말하되 고구려국에 있는 실성이 아니고는 빈약한 신라국(鷄林國 서벌 신라금성 신라)을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키 어렵다 하여 볼모에서 풀어오기로 했다.
신라국은 많은 댓가를 치르고 미추왕의 조카 실성(實聖)을 불러 왔다.
고구려국도 자기 나라에서 머물던 실성이 신라의 왕이 됨을 기뻐하고 기꺼이 그를 풀어 주었다. 고구려국의 볼모에서 풀려난 실성은 신라로 돌아와 국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결국 18대 왕이 되었다.
왕이 된 실성은 평소에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데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는 그 앙갚음을 하기로 결심했다.
선왕인 내물왕의 셋째왕자 미해를 왜국 볼모로 보내고 둘째왕자 보해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후 왕세자 눌지 마저 제거하기를 결심하였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거듭 할수록 눌지왕자가 자기의 왕자인 치술의 정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써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성은 과거 고구려국에 머무를 때 사귀었던 장수 몇 명을 몰래 불러「눌지를 선봉대장으로 하여 고구려국을 공격할 터이니 그때 처분하도록」약속했다. 만약 후퇴해 올 경우를 염려하여 실성이 직접 말을 몰고 후방에서 지키기로 했다. 즉 이쪽으로 쫓겨 오면 직접 자신이 그의 목을 벨 결심을 하고 진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가 선봉장 눌지를 보는 순간 너무나 인자하고 단아하므로 도저히 죽여서는 안 될 인물 같아서 그를 사로잡았다가 풀어주면서 실성왕과의 그 음모를 눌지에게 낱낱이 고했다.
이러한 사실을 직접들은 눌지는 크게 한 번 호탕하게 웃고는
"이는 우리 부왕(父王:내물왕)이 뿌린 업인과보(業因果報)이니 내 선대 실성왕을 결코 탓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말하였다.
그 때 고구려 군사가 오히려 실성왕을 에워싸고 그만 그의 목을 베었다.
그는 실성왕을 죽인 고구려 병사를 호되게 꾸짖고 돌아와 국인(國人)들에 의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실성왕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한편 실성(實聖)의 왕자인 치술(鵄述)을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실성의 아들 치술은 점차 나이가 들어 부왕(父王)이 행하신 그 사실을 알고는 어느 날 갑자기 궁에서 나가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왕비는 갑자기 사라진 동생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방을 붙이고 현상금을 걸고 수소문하였으나 수개월 동안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 매우 춥던 날, 약초를 캐던 아낙네에 의하여 얼어 죽은 치술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즉시 이 사실을 왕궁에 알렸다. 눌지왕은 아내와 같이 달려가 보았으나 이미 죽은지가 오래되었는지 전신이 돌처럼 얼어 굳어 있었다. 왕은 그 곳 부근어디에다 치술의 시신을 묻었다. 왕비는 동생의 무덤에서 삼일간 통곡하다 동생과 같이 죽겠다 하며 쓰러지니 왕은 이를 측은히 여기고 신하들에게 명하여 강제로 왕비를 가마에 태우고 궁으로 데리고 가도록 했다.
그 후 왕비는 날만 새면 그가 죽은 산을 향해 치술아 외쳐 부르며 통곡하고 우니 온 궁안의 신하가 따라 울면서 치술이 죽은 산을 향해 절을 했다.
치술 왕자의 혼이 한 마리의 솔개가 되어 산령(山嶺)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후부터 이 산을 치술령(鵄述嶺)으로 부르게 되었다.
2. 치술신모(鵄述神母)
김알지(金謁智 서기 65년)는 대서지와 구도갈문과 말구와 13대 미추왕을 낳으셨고 말구(미구)는 17대 내물왕을 낳고 알지의 아들 대서지가 18대 실성왕을 낳으셨고 실성왕이 그 아들 치술왕자를 낳으셨다.
내물왕은 늦게야 아들 눌지를 왕자로 낳았지만 이미 그 먼저 대서지가 특출하게 뛰어난 실성을 낳아 장성 했으므로 내물왕 37(392)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그러나 내물왕은 눌지왕자가 왕권을 전수하기 전에 병사하시니 나라에서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 볼모에서 풀어 신라국왕으로 모셨다. 실성왕이 신라국 왕이되자 실성은 돌아가신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 국에 볼모로 보낸 원수를 갚을 겸 그의 아들 모두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와 미해와 보해 모두를 제거해야 자기아들 치술을 아무런 탈 없이 자기 뒤를 이을 왕위자리에 승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는 계획대로 미해(미사흔)는 왜국(倭國)에 볼모로 보내고 보해(복호)를 고구려에 보낸 후 눌지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이르키게 하여 그 전쟁터에서 전사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계획대로 보해를 고구려에 보내고 미해를 왜국(倭國)에 보내고 눌지를 죽이기 위하여 고구려의 군사와 짜고서 전쟁을 일으켰다.
눌지를 선봉대장으로 진격시켜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눌지를 고구려 장수가 보는 순간 죽여서는 안 될 인물 같았다. 너무나 인자하고 중후 했다. 그래서 그를 사로잡은 고구려 장수는 눌지에게 실성이 자신들에게 당부한 이번전쟁의 발발 원인을 모두 이야기 해 주었다.
그동안 고구려 군장들이 오히려 어진 사람을 죽이려 한다하여 실성왕의 목을 베었다. 눌지는 고구려 병사를 향해
"본인(눌지자신)을 살려주면 그것으로 고마운 일인데 구태여 실성왕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 " 하고 크게 꾸짖고는 전쟁을 끝내고 국인들에 의하여 19대 임금이 되었다 .
왕이 된 눌지는 실성의 딸 공주를 아내로 맞아 왕비로 삼고 그녀의 어린남동생 실성의 왕자 치술을 왕궁에서 키우기로 하는 한편 왕이 된 눌지는 실성왕에 의하여 볼모로 잡혀가신 자기의 형제를 구해 오기를 결심했다.
이때 선택된 분이 박제상이다.
박제상(朴堤上)
박제상(朴堤上)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이다. 눌지왕(訥祗王)이 임금이 된 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구해온 충신이다.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로 가서 왕제(王弟)보해(寶海=卜好)를 구출해 내고 다시 왜국(倭國)으로 건너가 왕제(王弟) 미해(美海=未斯欣)를 구출해 귀국시킨 후 자신은 왜신(倭臣)에게 붙잡혀 목도에서 화형(火刑)당했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치술령 정상 움막집에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왜냐면 박제상이 고구려에 가서 보해(복호)를 구해오는 데는 그런대로 어려움이 따랐지만 쉬웠다. 하지만 왜국(倭國)에 볼모로 잡혀 간 미해(미사흔)를 구해오는 데는 자기 생명은 물론 가족들의 희생이 따라야만 가능했다.
우선 자신이 왜국의 진정한 신하가 되었다는 믿음을 왜왕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는 신라로 잔입 해 온 왜국(倭國)의 간첩들을 속여야 했고. 그 첩자들을 속이기위해서는 자기 가족을 나라를 배반한 역모의 죄목을 만들어 유배를 시켜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결국 박제상의 가족은 치술령에 유배되었다. 치술령에 유배된 박제상의 가족들이 남편과 아버지를 긴 시간 기다리다 왕제 미해는 구해 돌아왔으나 자기남편은 불타 죽게 되는 비극을 낳았다. 그것을 알게 된 가족은 남편과 아비가 불타 죽는 그날을 알고 매일 동해를 바라보며 기다리던 그 바위위에서 그 부인과 두 딸이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때 박제상의 아들 문량의 만류로 죽지 않고 살아난 둘째 딸 아영은 훗날 미해의 부인이 되어 왕제 미해의 부인이 되어 궁중에서 살고 있었다.
왕궁에서 함께 자라고 있었던 치술은 자연히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그 사실을 알게되었다.
치술신모와 치술왕자
눌지왕과 실성왕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자비(慈悲)이다.
자비(慈悲)가 왕이 되어 맞이한 왕비가 곧 미해와 박제상의 딸 아영이가 낳은 딸이다. 아영의 딸이 자비왕의 왕비가 되었다.
아영의 딸이 20대 자비왕(慈悲王 458~479)의 왕비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 그 왕자가 소지(炤知)다. 훗날 21대 소지왕(재위; 479~ 500년)이 된다..
그리하여 박제상 외 손녀의 딸(아영의 딸)은 왕후가 되고 그 왕후의 남동생 문량은 소지의 외숙부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왕궁 속에서 자란 치술은 나이가 들어 선친이 자신을 왕위에 세우기 위하여 저지른 그 악날(惡捺)한 행위를 알고 그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견딜 수가 없었다.
불공대천지 원수인 자신의 누이를 왕비로 맞아 주고 그 동생인 자신을 궁에서 처남으로 대우하며 키워준 눌지왕의 넓은 마음에 감명을 받았음은 물론 문량을 대하기도 거북했고 자비왕의 왕후가 된 아영의 딸을 대하기도 너무 어려워 이를 참회하기 위하여 아무도 몰리 치술령 망부석 아래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는 박제상부인의 영령을 자신의 영모로 모시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참회하였다. 심히 굶주리고 지친 가운데 혹독한 설한에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 죽었다.
그때 이후 박제상의 부인 김교부인을 치술이 영모로 모신 분이라 했고
그 령을 신이라 하여 치술 신모라 일컫게 되었으며 그때 이후로 국대부인을 靈母(神母)로 모시고 참회의 기도를 하다 얼어 죽으니 이 산을 치술령이라 했다 한다.
참고『삼국유사』 왕력 및『삼국사기』 권 제3 참조. 고 안응묵, 안병옥의 구전(口傳)을 인용함. }}
3. 망부석
최근에 새로 부임한 훌륭하신 경주 백상승 시장님이 울산시에서 석계초등학교 교가를 만들 때 세워둔 그 망부석 표지판을 뽑아 없애버린 것을 다시 그곳 본래의 망부석 옆에 표지판을 세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도경계를 의식해서인지 여전히 울산 쪽에서는 정상 서쪽 300미터 하에 있는 효녀아기바위를 망부석이라고 표지판을 세운 것을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이는 경주에서는 울산시가 울산 자기 구역 내의 바위를 남서쪽 국수봉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지라도 그 바위를 망부석이라 하든 관여할 바가 아니므로 저들 마음대로 하도록 그냥 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출판기념회 이후에 부산 모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는 초등학교 동기생 친구로부터 東景通志序에 있는 김종직의 치술령 관련 시와 유호인의 망부석 관련시를 읽게 되었습니다.
김종직학자는 조선 전기(세종13~성종23년)의 성리학자로 1431년출생 하셨고 1492년에 돌아가신 분으로 그 출생지는 경남 밀양이고 경력은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1459)한 학자로 그 가 남긴 저서는 '유두유록'등 이 있다.
동경통지서에 그 시를 밝힌바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편 이십삼(二十三)쪽 ~ 이십사(二十四)쪽 과 치술령(鵄述嶺) 박제상(朴堤上) 십사(十四)쪽 >에 보면 시 한편을 남기셨는데 이 시에 치술령의 망부석 위치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그 시(詩)를 이렇게 번역해 보았습니다.
鵄述嶺頭望日本
치술령두망일본= 치술령 정상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粘天鯨海無涯岸
점천경해무애안 = 바다의 배가 하늘에 붙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良人擧示但 搖手
양인거시단요수 =부질없이 손 흔들어 보이든 그님
生歟死歟音耗斷
생여사여음모단 =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조차 끊기었소
長別離死生寧有
장별이사생녕유 = 이별한지 너무 오래라 살아 죽지 않고 편히 잘 있는지
相見時呼天便化
상견시호천편화 = 서로 만날 그 때까지 편히 잘 있기를 하늘에 호소한다
武昌石烈氣千載
무창석열기 천재 = 굳세고 창성한 반석 같은 님의 그 절계 천만년 이어가도록 .
干空碧
간공벽 = 저 푸른 하늘에 울타리 만들어 막으리라
치술령 정상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수평선 저 넘어 정처 없이 떠나는 배(고래)
내 님은 부질없이 손들고 흔들었다
해어 진지 너무 오래라 죽지 않고 잘 있는지
소식이 끊어진 이후 생사가 묘연(杳然)하다
하늘에 부탁하노니 서로 만날 그 때까지 편히 계시기를
굳세고 창성한 반석 같은 님의 그 절계 천만년 이어가도록
저 하늘에다 울타리 만들어 막으리라
점천 =수평선으로 고래를 =배로 번역함
鵄述嶺頭望日本
분명 치술령 <중턱이 아닌> 머리에서 일본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유호인(兪好仁) 의 시(詩)
孤臣一死答君恩
고신일사답군은 =한 신하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위해 외롭게 죽으니
萬里扶桑寒節尊
만리부상 한절존 = 높이 지킨 그 절개 얼게 했다 일본 전체를
鵄述峰頭三丈石
치술봉두삼장석 = 삼십척(三十尺) 높은 바위 치술봉 정상에서
愁雲猶帶望夫魂
수운유대망부혼 = 지아비의 넋을 기다리는 구나 지금도 깊은 수심에 잠긴 체
의역(意譯)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한 신하가 외롭게 죽으리
고귀하게 지킨 그 절개는 온 일본 열도를 얼개했다
삼십척 높은 바위 치술령 정상에서
지금도 깊은 수심에 잠긴 체 지아비의 넋을 기다리고 있구나
鵄述峰頭三丈石 치술봉 머리에 3장(30자)높이의 바위를 말하니
그 바위역시 치술령 <중턱의 바위가 아닌 >정상의 바위를 말한다.
이렇게 울산 읍지(1934년)가 만들어지기 근 480여 년 전부터 이미 망부석 위치가 치술령 산머리(정상)에 망부석이 있음을 정확하게 밝혀 입증하고 있습니다.
약 8년 전 그 당시 출판 기념회를 열고 남북 시장과 향토사학자를 코오롱 호텔로 모시고 그 사실을 알리고자 초대장을 올리고 하였습니다만 관련자들이 한분도 참석하지 않아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실로 저는 참담했습니다.
내 나름대로 망부석의 위치를 바로잡기 위하여 5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가며 여러 해 동안 그 사실 확인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했지만 울산시도 경주시도 모두들 자기들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없었던 탓인지 무관심했고 뿐만 아니라 그곳 인근 주민들조차도 강 건너 불 보기였으니 어쩌겠습니까?
소인은 정말 분하고 억울 했습니다. 진실이 이토록 외면당할 수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1934년도의 울산 읍지의 기록을 보면
「망부석재 치술령상신라눌지왕이년박제상사어왜국기처금씨부승애원졸이녀상차산망왜국통곡이사신화위석혼위조혹운장녀아기삼여아경개곡진이사이녀아영독부사왈아약종순수매아모급자호우수양아제문량호귀이맹금망부석좌우유이석시이녀신화운일운부인지기석」
「望夫石在 鵄述嶺上新羅訥祗王二年朴堤上死於倭國其妻金氏不勝哀怨卒二女上此山望倭國痛哭而死身化爲石魂爲鳥或云長女阿奇三女阿慶皆哭盡而死二女阿榮獨不死曰我若從殉誰埋我母及姉乎又誰養我弟文良乎歸而盲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에 있다. )
「望夫石在 鵄述嶺上」
(신라눌지왕 2년 박제상이 왜국에서 죽으니)
「新羅訥祗王二年 朴堤上死於倭國」
(그의 처 김씨는 원망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죽었다. )
「其妻金氏不勝哀怨卒」
(이 산상에서 두 여식(女息)도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몸은 돌로 화하고 혼(魂)은 새가 되었다. )
「二女上此山 望 倭國痛哭而死. 身化爲石 魂爲鳥」
(혹 이를 두고 이르기를 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은 모두 함께 슬픔이 극에 다다라 쓰러져 죽었고 둘째딸 아영(阿榮)은 홀로 죽지 아니 했으니)
「或云長女阿奇三女阿慶 皆哭盡而死 二女阿榮獨不死」
(아영(阿榮)이가 말하되, 만약 나마저 따라 죽고 나면 누가 내 어머니와 여동생을 묻을 것이며 또 누가 나의 남동생 문량이를 키우겠는가 하고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져 돌아갔다. )
「曰我若從殉誰埋我母及 乎又誰養我弟文良乎 歸而盲」
(지금 망부석 좌우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것은 두 계집의 몸이 화한 것이라 하고 일설에 의하면 부인의 베틀바위라고도 한다. )
「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
우선 위의 내용부터 요약 이해한 후 중요한 부분은 다시 다루고자 합니다.
「망부석은 치술령 (중턱이 아닌) 상(上)에 있고 박제상은 눌지왕 2년 왜국에서 죽었다. 그 부인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죽고 그 뒤를 따라 장녀와 셋쩨딸도 죽었다. 둘째딸 아영이는 어머니와 언니와 여동생의 장례식(葬禮式)을 염려하고 남동생 문량을 키우기 위해 함께 죽지 않고 돌아가려고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 망부석 좌우에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이는 두 계집의 몸이 화하였다 하며, 한편 이르기를 부인을 지탱시켜 온 베틀바위이라고도 한다. 」
「……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
현재 울산에서 정상 서족 300m 하에 있는 망부석이라 세긴 돌을 보면 망부석 좌우에 바위가 있다 했는데 중간에 있어야할 망부석이 동쪽 편 우측에 있다. 따지면 울산 읍지에 기록된 대로의 바위도 아니다.
문제의 1934년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울산읍지』3쪽 망부석 항목 부분의 이 기록은 '누가' '무엇에 근거를 하여' '왜 그렇게 썼는지'는 모르지만 치술령에 있는 세 곳의 바위는 그 명칭이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분이 쓴 것 같습니다.
추측컨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치술령의 망부석에 대한 이야기만을 듣고 그것을 읍지에 기록했다 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망부석」과「은을암(隱乙岩)」의 방향표시를 전혀 엉뚱하게 기록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박제상부인의 몸은 떨어져 죽어 바위가 되고 그 혼(魂)은 백조(白鳥)가 되어 동쪽 왜국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 남편이 화형당한 붉은 구름이 솟구치는 그 속으로 사라졌다는 전설을 알고 있었기에 그 은을암이 망부석 십리 동쪽에 있다.
「隱乙岩 在 望夫石東十里」
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을암은 망부석 동쪽이 아니라 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서쪽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실재(實在)하는 망부석의 위치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구전으로 들은 것을 책상 앞에서 기록하려 하니 은을암이 있다 하는데 망부석에서 새가 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하니 아마 동편 십리 어디에 있지 않을까? 하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술령 정상에서의 일본 목도인 대마도는 국수봉 방향 남남서편넘어에 있었고 그때 솟구친 붉은 연기구름도 그 쪽이었으며 어미새가 날아간 방향도 그쪽입니다.
어미새를 찾지 못해 연기 구름 속에 해매이다 지처 날아든 곳이 비조 였고
그곳에서 나뭇군(도인)에게 쫓기어 날아든 곳이 국수봉 중턱 아래에 있는 바위 굴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미새는 왜국(倭國) 목도에서 불타는 남편을 맞이하러 갔고 그 딸들이 새가되어 숨었다는 전설의 바위가 은을암입니다.
은을암은 박제상 부인의 혼인 어미새가 날아들어서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두 딸의 혼이 새가 되어 어머니 뒤를 따라가려 했으나 어미 새를 놓쳐 버리고 그만 지쳐 국수봉(國讐峯) 하(下) 바위틈으로 들어가 숨었다 하여 생긴 전설에 의해서 만들어진 바위이기 때문입니다.
은을암(隱乙巖)은 망부석에서 본 방향은 남서쪽이다.
왜국(倭國) 하늘을 향해 날아간 어머니의 혼을, 엉뚱하게도 딸의 혼이 새가 되어 숨어들어 갔다 하여 만들어진 그 은을암에 적용시켜 전설을 만들고자 하니 은을암이 동쪽에 있다고 오기(誤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울산읍지』은을암 항목의 전문을 보면「은을암 재 망부석동십리 속전 박제상부인혼조비입암혈간금암혈수연적」「隱乙岩 在 望夫石東十里 俗傳 朴堤上夫人魂鳥飛入岩穴間今岩穴水涓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풀어 보면 「은을암이 있는 곳은 망부석 동쪽으로 십리다. 속담에 전하기를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 바위구멍 사이로 들어갔다' 한다. 지금도 그 바위 구멍에는 물이 졸졸 흐르며 (눈물이) 똑똑 떨어진다. 」 고했습니다. 기록자가 만화리「세 효녀아기바위」에서나 녹동의「망부석」에 올라가서「은을암」을 보았다면 아무리 동서남북 방향감각이 무딘 어린 아이 같은 이라 해도 해가 돋는 쪽은 동쪽이요 지는 쪽이 서쪽이라는 사실만 알아도 망부석에서 은을암이 동쪽이 아니고 남남서쪽이나 남서쪽임을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화리쪽에서 주장하는 대로「세 효녀아기바위」를「망부석」이라 한다 치더라도 그곳의 방향은 결코 동쪽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보면 은을암은 남쪽 혹은 남남 서쪽이 됩니다.
치술령 정상에 있는「망부석」 바위에서는 정남남서쪽입니다.
이쯤 하면 우리는 누구나 쉽게 망부석 동쪽에 은을암이 있다고 그렇게 주장한 1934년도에 만들어진『울산읍지』가 이 부분 만큼은 최소한 오기(誤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동쪽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새가 되어 날아가 숨어 있었다는 전설의 바위가「은을암」이라면 응당 그 은을암은 동쪽에 있어야만 논리상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을암은 다시 한 번 밝혀 드립니다만 박제상 딸들의 혼이 새가 되어 어미새를 따라가려 했으나 붉은 구름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하늘에서 배회하다 힘이 없어 남서쪽 국수봉 아래 바위틈으로 숨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때 새가 날아간 그 하늘 아래의 마을 이름을 비조(飛鳥)라 하였습니다.
그리고「아버지 어머니를 처참하게 돌아가시게 한 이 세상이 보기 싫고, 또한 어머니의 자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으로 하여 바위틈으로 숨어 들어가므로 은을암이라 불렀다」는 전설은,『울산읍지』의 기록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또 '망부석 바위 우측 틈새로 시시때때로 누수(漏水)현상이 있고 눈물 흔적이 있다'는 전설과, '딸들이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은을암」전설이 합쳐진 것을『울산읍지』에서는 연적(涓滴:눈물이 줄줄 흐르며 뚝뚝 떨어진다)이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짐작이 갑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울산읍지』에서 밝힌「망부석」은 진짜가 아닌 가짜이며 임의로 만든 망부석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세 곳에 있는 바위의, 전설을 한 곳에 있는 세 개의 바위로 묶어 이와 연관된 또 다른「은을암」전설과 결부시키려 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울산읍지』 기록자들이 천에 하나 치술령에 올라가「망부석」탐사를 했다 칩시다.
아마 그들은「은을암」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울산시 두동면 만화리 쪽으로 오르다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세 효녀아기바위」를 보고 세 곳
{ 세 곳으로는
①울산 만화리쪽의「세 효녀아기바위」,
②치술령 정상 북쪽의「베틀바위」,
③녹동쪽에 있는「망부석」을 일컬음.
이들 바위에는 각기 다른 전설이 있음. }
에 있는 세 전설의 바위로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착각하지 않고서야 엄연히 존재하는 박제상 가족의 설화가 얽혀있는 세 곳의 바위를 두고, 한 곳에 있는 세 개의 바위로 기록할 바보는 없기 때문입니다.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누군가에 의해 확인이 충분하지 못한 가운데 그와 같은 잘못된 기록을 남기게 된 것 같습니다.
이 기록 하나만 보아도 1934년판『울산읍지』 전설편 중의「망부석」기록은 신빙성(信憑性)이 거의 없는 것이 아닐까 심히 염려됩니다.
또한 아기(阿奇)·아경(阿慶) 두 처녀는 죽은 뒤 새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비조(飛鳥)마을 하늘 위로 날아가 국수봉(國讐峯) 아래에 있는 바위굴에 숨었으므로「은을암(隱乙岩)」이라 호칭하게 되었다는 전설은, 「세 효녀아기바위」라 전하는 그 바위 전설과는 연관이 깊은 것 같습니다.
「은을암」과「세 효녀아기바위」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이는 큰딸 이름이 아기(阿奇)이므로 그 이름을 따서「아기(阿奇)바위」라 불렀다 하며,{아기·아경 두 딸의 시신을 묻은 곳이라 한다.}
어떤 분이시든지 앞에서 밝힌 이 사실을 알고 치술령 정상 녹동의 망부석에 올라가 보면『울산읍지』에서 밝힌 그 기록이 얼마나 엉터리이며 세 장소의 여러 바위들을 한 장소에 있는「세 효녀아기바위」로 착각하고 기록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리라 봅니다.
구체적으로 다시 정리해 말씀드리면,
①「세 효녀아기바위」는 '박제상의 세 딸이 치술령에서 어머니와 함께 머물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는' 세 효녀의 전설과 '아기·아경의 두 처녀 시신을 묻었다는' 처녀 아기(阿奇)의 전설과 '두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마주 보이는 국수봉의 바위에다 암자를 지어 주었다'는 은을암을 지은 동기의 전설이 서린 바위다. (치술령 정상에서 약 300m 남서쪽 능선을 타고 만화리쪽으로 내려가면 바위가 세 개 있는데 제일 높은 동쪽의 바위가 4m 20cm이다. )
②「베틀바위」는 국대부인은 죄 없이 치술령에 유배되어 남편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기 위해 베틀을 차려 놓고 딸들과 교대로 베를 짰다고 하는 바위다. 치술령 정상에서 북쪽 능선 약 100m 아래에 있는 세 개의 바위로 가장 높은 맨아래 바위 높이가 약 7m이고 중간바위가 5m이며 윗쪽 낮은 바위가 약 2m 50cm이다. 특히 중간 바위는 흡사 배를 두루마리한 것 같은 여러 층계가 있어 특이하다.
③「망부석」은 박제상 부인이 매일 시간을 정하여 놓고 부처님 대신에 동해를 바라보고 천지신명에게 기도드린 기도처이고, 박제상 부인이 치술령 산신에게서 '흰 구름이 솟구치면 남편이 살아오고 붉은 구름이 솟구치면 남편이 죽어 온다'는 몽시를 받은 곳이다. '몽시로 알려준 그날 특별히 동해를 바라보다 붉은 구름이 솟구치니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 더 이상 살아서는 남편을 만날 수 없음을 알고 죽어 혼이 되어 남편이 있는 그곳으로 날아가 남편을 만나서 신라국으로 모시고 오고자 하여 그 바위에서 몸을 날렸다.
이후 아직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동해 건너 일본을 바라본다 하여 망부석이라 불렀다. ' 혹은 '붉은 구름을 보는 순간 졸도하여 몸이 굳어 망부석이 되었다. ' '그 혼은 억울하게 화형당해 죽은 남편을 만나보기 위해 붉은 그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
'지금도 시시때때로 남편을 그리며 울고 있어 그 바위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다'
(치술령 정상 남동쪽 9 9부 능선, 해발 765m 정상에서 약 10m 아래의 녹동쪽. 이 바위는 높이가 18m 이상이며 윗면 가로의 길이가 11m 이상임. )
이와 같이「세 효녀 아기바위」와「베틀바위」와「망부석」은 각각 엄연하게 따로 있습니다.
이와 같은 데도「망부석」과「베틀바위」가 같은 바위이고 망부석 좌우에 바위가 있다(금망부석좌우유이석시이녀신화운일운부인지기석) (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는 『울산읍지』의 설명은 일제치하에서 기록자가 일제의 관여하에 억지로 쓴 것이 아니면, 당시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을 표방하며 동남아 일대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군국주의자들이 그 옛날 일본에 항거하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였던 신라충신 박제상과 그 일가의 충효절의 정신을 왜곡·말살시키고자 하는 저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설혹 직접적으로 탐사를 하여서 기록하였다 해도 엉터리이므로, 1934년도판『울산읍지』의「망부석」 항목을 근거로 만들어진 울산광역시 두동면 만화리쪽에 있는 그 바위를「망부석」이라 했다면 다시 재고하심이 어떠할는지요?
필자의 우둔한 판단으로는 만화리 망부석은 자연히 망부석이 아닌 엉터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믿습니다.
그 외의 다른 자료가 있습니까? 있다면 필자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망부석은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산 161번지의 지금도 동해를 바라보며, 일본에 간 남편을 그리며 서 있는 높이 18m 80cm의 그 바위입니다.
박제상이 왜국에 가서 볼모로 잡혀 있는 미해를 구하여 신라로 보내고 자신은 그곳 일본 목도(木島:대마도)에서 화형당하였다. 부인은 이때 남편 박제상이 나라를 배반하고 왜국의 신하가 되었다는 누명을 쓴 채 치술령에 유배되어 살면서 이 바위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렸다. 동해를 바라보며 기다리던 중 남편이 왜국 목도에서 화형당한 것을 알고는 그날 뛰어내려 죽었다.
두 딸도 뛰어내려 죽었다. 그래서 이 바위를「망부석」이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박제상이 왜국에 볼모로 잡혀있는 미해를 구하기 위하여 떠날 때 왜국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하기위해 미리 나라에서 거짓으로 박제상을 역적으로 몰아 그 가족을 이 산속으로 유배하여 살게 했던 것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4. 백결선생
문량은 후에 백결선생(百結先生)이 되어 낭산(狼山)으로부터 숨어들어 이곳에 와서 살았다 전한다.
약관의 나이 때 문량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누나의 죽음으로 하여 드디어 입신출세하게 된다. 즉 누이(阿榮)가 미해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19대 눌지왕이 죽고 20대 자비가 어린 나이에 새 왕이 되자, 외숙인 문량은 지근 거리에서 왕을 모셨다. 항상 직언(直言)으로 충신의 아들답게 자비왕을 보필하는 문량이 간신들에게는 눈에 가시와도 같았다.
기회만 엿보던 간신배들이 모략을 꾸몄다. 국대부인의 예우로 어머니의 시신을 처음 모신 장지(葬地)는 지금의 망덕사지 부근 어디였다. 이상하게도 그곳에 분묘를 쓴 후부터는 하늘이 구름 속에 숨어서 햇빛을 주지 않았다.
매일 비가와도 저수지가 말라 있었다. 비가 많이 와도 10mm 미만이었다. 가랑비가 아니면 이슬비만 계속 왔다. 햇빛을 못 본 산천 초목은 자연히 결실을 맺을 수가 없었다. 해마다 흉년이 겹치었다. 이러한 건장마가 수년간 계속되자 어느 풍수가 입을 열었다.
"이는 죄없는 국대부인을 산정에 유배하여 그 가족을 죽게 한 원한의 눈물이다. 원한이 하늘에 사무치어 햇빛과 비를 주지 않고 365일 눈물이 흘러 대지를 적시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원혼(怨魂)을 달래지 않으면 산천초목이 열매를 달지 못하고 심지어는 백성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으니 하루 속히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원혼을 달래려면 부인의 유해를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치술령 정상 그 바위 위에다 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는 곧 효심이 많은 문량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문량이 차츰 나이가 들자 아버지와 어머니와 두 누나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은 그때 나라님이 우리 가족을 치술령에 유배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날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문량은 분했다. 아버지를 기다리다 떨어져 죽은 어머니가 한없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꿈속에 어머니가 나타나서 통곡하다 망부석에 뛰어내리는 꿈을 꾸고는 소스라치며 놀라 깨기도 했다. 문량은 누나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서 의논했다. 아영은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남편은 나라님에게 간청을 했다. 그래서 결국은 망덕사(望德寺) 부근 어디에 있던 무덤을 망부석 위에 이장(移葬)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이장하는 그날이었다. 아침나절까지 흐리던 하늘이 이장을 하자마자 갑자기 큰비를 쏟았고 다시 깨끗이 개였다. 말랐던 저수지마다 물이 가득 찼고 벼농사도 대풍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부터는 날이 가물기 시작하였다. 365일 청천 하늘에 햇볕이 내리 쪼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내용인즉, 박문량이 치술령 정상에다 그 어머니의 유골을 이장하였는데 이는 장차 그가 용상(龍床)에 올라 보겠다는 것을 나타낸 행동으로 이는 가벼이 볼 문제가 아니라 하여 왕으로 하여금 문량을 멀리하게 했다.
자비왕은 간신배의 모함을 사실로 믿고 문량을 추방하니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는 망부석 위에 안치했던 어머니의 유해를 거두어 진달래꽃이 만화방창(萬花方暢)했던 만화리(萬花里) 동산에 새로 모신 후 벼슬에서 떠나 낭산(狼山)으로 숨었다가 가족을 데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곳에서 숨어살았다 한다. 그때가 백결선생이란 칭호를 받은 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치술령은 바로 박제상 가족의 피눈물과 땀과 생사(生死) 고난(苦難)의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지금은 실성왕의 아들 치술의 전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삼국유사』 왕력편에 실성왕을 치술의 아버지라고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망부석(望夫石) 또한 경상남·북도가 각각 그 바위의 위치를 달리 주장하여 두 개의 망부석이 되어 가고 있지만, 실재(實在)하는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 남동쪽 바로 아래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산 161번지에 솟아 있는 높이 약18m 85cm, 윗면 폭 11m 16cm의 큰 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망부석이 치술령(鵄述嶺) 정상 남동쪽 산 161번지의 바위일 수밖게 없는 이유
필자는 외동읍 석계리 시래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치술령(鵄述嶺)을 마주하는 천마산 줄기인 우리 마을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보다 망부석이 잘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특히 청년시절에 필자는 국제승공연합경북도단 강사(國際勝共聯合慶北道團 講師) 로 활동하다 경주경찰서 외동지서 대공분임교관(對共分任敎官)으로 위촉되어 외동읍 전역을 다니면서 반공계몽(反共啓蒙)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때 필자는 우리 민족정기가 된 충효열의 정신을 외치었습니다. 그렇게 강의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이 충성을 논할 때는 정몽주(鄭夢周)·안창호(安昌浩)·유관순(柳寬順)을, 효를 강조할 때는 절효(絶孝) 김극일(金克一) 선생과 효녀(孝女) 심청(沈淸)을, 열행을 논할 때는 박제상의 처 국대부인 김씨와 성춘향(成春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결론적으로 이 충효열의(忠孝烈義) 사절(四節)을 한 대(代)의 한 가정 모두가 실천한 가족으로서는 만고충신 박제상의 가족밖에 없다고 설파하였습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박제상의 충(忠)과 처의 열(烈)과 자녀들의 효(孝)와 여기서 나아가 아영(阿榮)과 문량(文良)의 의(義)까지를 알게 되므로 해서, 나자신 결국은 주저없이 내 고향 치술령「망부석」전설을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강의가 끝나기 바쁘게 이 지방의 유지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박제상에 관련된 일화며,「망부석」에 얽힌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니까 필자는 본의 아니게 그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남달리 많았습니다. 싫건 좋건 때로는 그분들과 함께 치술령에 올라가「망부석」과「세 효녀아기바위」와「베틀바위」를 일일이 답사하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필자와 같이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보내지 않은 많은 분들은 같은 경주시에 살면서도 망부석의 확실한 실재(實在) 위치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는 경주시 당국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필자는 봅니다. 왜냐하면 경주시가「망부석」을 과소평가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관문성은 경주시 지방문화재 제48호{{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 122번지에 있는 이 성은 성말리(成萬里)를 거쳐 경상남·북도의 경계가 된 채 천마산 봉우리 바로 9부능선 아래를 지나 녹동 성저(城底:城地)로 연결되고 경남 관문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다시 치술령 반동재 아래로 쌓아진 성(城)이다.
}}로 지정하면서도,「망부석」이 녹동 산 161번지 내에 있다는 것을 지적도를 통해서나 각 읍면동의 행정 정보망을 통해서 알 수 있었음에도 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웃 울산시에서는 울산시 관내 두동면 만화리쪽에 있는 치산서원을 증축(1985-1992)함과 동시에 경상남도 지방문화재 제90호 내의 부속물로 지정하였다가, 다시 울산광역시로 개칭되자 이를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재 지정하여 전국적으로 홍보함과 동시에 치술령 정상에다 국대부인 신모사지(神母詞地)의 대형 비문(碑文)을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경주시와 울산시와의 문화인식의 차이가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웅변하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주시의 무관심에서 빚어진 작금의 전후 사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경주·외동·녹동 주민의 정서는 돌아보지 않고 울산시 두동면 만화리의 주민 정서와 치산서원의 정보만을 접한 채 그쪽으로 등정(登頂)하여「망부석」아닌 망부석을 보고 진짜 망부석이라 착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최근 울산시에서 지정한「망부석」의 위치를 그대로 믿고 잘못 판단하고 계시는 분들을 위하여 민초 시인인 필자가 감히 필을 잡고 경주쪽 대체의 정서를 밝히며 또한 그 위치를 확실하게 규명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규명하지 않는 한 망부석 논란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은 두 개의 망부석이 탄생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남이 말하는 자료나 기록만을 가지고 그것을 그대로 믿고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우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필자도 망부석(望夫石)의 높이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 대충 기록하여 약 4m 50cm라고 첫시집『치술령 산울림』에 발표하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치술령 산울림』. 「죽어 버린 태양이여」김대원 저, 드림출판사. 992년}}
그러나 사실상 외동읍 녹동리를 찾아가서 지적도를 살펴보니 치술령 정상은 녹동 산 161-1번지로 기록되어 있고, 망부석 위치는 녹동 산 161번지 내에 있었으며, 실제 망부석 높이를 재어 보니 약 18m 80cm였습니다.
그러니 지적도를 펼쳐보지 않고 위치를 기록한다던가 그 높이를 대충 보고 기록한다는 것은 경솔한 행위임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경주풍물지리지(慶州風物地理誌)』{{ 김재식, 김기문, 1992년판. 외동읍편. 443쪽}}는 석계편에서 망부석을 찾도록 편집한 것이나,『서라벌명감(徐羅伐名鑒)』{{ 서라벌명감편찬위원회·발행인 김경오. 1988년판. 박제상 항목의 247쪽. }}은 치술령에 망부석이 있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면서도 정작 장소를 명확하게 기재하지 못한 것이나,『내고장 외동읍』{{ 1990년 신용범 편. 황능곤 50쪽과 또 72쪽}}을 보면 치술령과 망부석 위치가 석계 지역의 산에 있다고 오기한 것이나,「치술령에 국대부인 애화가 서린 망부석과 신묘사가 있다」라고 간단하게 기록하여 읽는 이에 따라 약간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소지를 남기고 있는 점 등입니다.
울산시에서 주로 인용하는 망부석 위치 자료근거는 1934년판 일제(日帝)시대 만들어진『울산읍지』의 망부석 항목 맨끝에 기록하고 있는
「…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 이 내용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읍지의 문장을 해석하면 「지금 망부석 좌우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두 계집의 몸이 화하여 된 것이라 전하고, 또 한 설은 부인을 지탱시킨 베틀바위라 한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대목을 읽은 후 필자가 아무리 글쓴이의 편에 서서 이해하고 양보를 해도 용납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 곳의 바위를 모두 엎치어 한 곳에 있는 것으로 만들어 적고 있을 뿐 아니라, 치술령 정상에서 서쪽 줄기의 300m 아래 산중턱인 울산광역시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바위인「세 효녀아기바위」{{「효녀바위」,「아기(阿奇)바위」,「효녀아기바위」 혹은「 효녀아기바위」,「처녀바위」,「공주바위」라고도 함. }} 셋을 보고는 얼토당토 않게 망부석 바위, 베틀바위로 주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쪽 정서가 그러했다 쳐도 다음에 다시『울산읍지』의 원문을 밝히겠지만 필자가『치술령 산울림』 시집을 내면서 실제 확인하지 못한 채 망부석 높이를 추측으로 적다 보니 오류를 범했듯이 일제치하에 기록된『울산읍지』는「망부석」 항목의 경우 객관적인 입장에서 신빙성을 보장하기는 사실상 매우 어렵다고 보아집니다.
앞으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합니다. 치술령에 서려있는 박제상 가족에 대한 세 종류의, 그 전설의 바위를 조사자들이 치술령에 직접 찾아와서 일일이 답사· 확인하지 않고 다만 한 장소의 바위로만 막연히 알고 기록했거나, 외동읍의 석계·녹동쪽으로 오르지 않고 울산광역시 두동면 만화리의 치산서원쪽으로 오르다 박제상의 세 딸이 치술령에서 어머니와 함께 유배되어 살았다는 전설의「세 효녀아기바위」를 보고는 그만 망부석이라 착각하고 기록한 것이 아닐까 심히 우려됩니다. 왜냐하면 외동·석계·녹동 주민의 정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석계리에 있는 석계초등학교에서는 교가(校歌)에까지 치술령 박제상의 충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 학생들은 4. 5. 6학년만 되면 해마다 봄·가을로 치술령 산정으로 소풍을 갑니다. 정상 남동쪽 바로 아래 녹동쪽 망부석에 앉아서 선생님으로부터「망부석」전설과「베틀바위」전설,「세 효녀아기바위」의 전설을 들으며 박제상 일가의 충절에 도취하여 목청 높여 교가를 불렀었습니다.
우리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하여 산이 흔들리도록 쩌렁쩌렁 합창을 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박희수 선생님(74세, 석계 2리 1139번지), 이계원 교감선생님(경주거주), 박열수 선생님(75세, 문산리 우박), 최장수 선생님(75세, 석계 1리), 그 외에 김석진 선생님 등등 모든 선생님이 한결같이 녹동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망부석」이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고 만화리쪽 바위를「세 효녀아기바위」라 했으며, 정상 북쪽 바로 아래의 세 개의 바위를「베틀바위」라 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울산쪽 정서는 어떠한지 몰라도 경주쪽 정서는『울산읍지』에 실려진 그 내용과는 크게 다릅니다. 혹시 경주쪽 인사 가운데 만화리쪽『세 효녀아기바위』를 두고서「망부석」이라 착각하시고 계신 분이 있다면, 지도를 펼쳐 놓고 확인하는 절차 없이 치산서원쪽으로 올라와서 망부석이라 각인된 그 바위를 보고는 아무런 주저없이「옳다, 저것이 망부석이구나」하고 막연히 믿었거나,『울산읍지』를 먼저 접하신 다음 고정관념을 가지고 접근하신 분이 아닐까 심히 염려됩니다.
그래서 잡초와 같이 살아온 민초(民草) 시인이 감히 아래에 다음과 같은 분에게 재삼 문의하옵고, 저의 이 글을 참고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옵니다.
① 지적도 한 번 펼쳐 보지 않고 망부석을 치술령의 석계구역 산에 속해 있다고 하신 분.
② 혹은 치산서원이 증축된 후에 두동면 만화리로 올라가, 울산시에서 한 곳에 있는 세 개의 바위를 보고 이 바위 하나에다「망부석」이라 각인해 두었으므로, 그것이 박제상의 세 딸을 칭하는「세 효녀아기바위」임에도 불구하고, 잘못 지정한 것임을 모르고 울산시의 주장을 그대로 믿고서 망부석이 치술령 서쪽 몇 부 능선에 있다고 설명하신 분.
③「망부석」이라고 바위에 각인해 둔 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남들의 주장 따라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세 효녀아기바위』를 두고 망부석이라 믿고 있는 분.
④ 혹은 경상남도 지방문화재 제90호 속에 망부석을 포함시키신 분.
⑤ 울산시에서 어마어마한 자금을 투입하여 치산서원을 증축(增築) 하고나서 망부석을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는데 일조하신 분.
⑥ 울산시청 문화계 소속 직원, 경주(慶州)나 울산(蔚山)의 향토문화연구소(鄕土文化硏究所)에서『울산읍지』 1934년판 고적조(古蹟條) 3쪽의 한문(漢文)이나 7∼9쪽의 사진을 근거로 하여「망부석」관련 논문을 발표하신 분.
⑦ 동아대학교 심봉조 교수님, 당시 김태호 국회의원님.
⑧ 특히 울산시 문화공보실에 계시는 분.
⑨ 문화원에 종사하는 관계자 여러분.
지금 경주 외동쪽 녹동· 석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정서가 어떠한지 이 책을 꼭 읽고 다시 한 번 참고하시고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
저는 무자년(1948년) 음력 2월 12일에 경북 경주시 외동읍 석계 2리 740번지 천마산(天馬山) 줄기 '시래'에서 태어나 방문만 열면 가슴에 안기는 망부석을 바라보며 자랐던 사람입니다. 이곳에서 자라면서 망부석과 관련된 전설을 알기 위해 여러 번 같은 이웃에 사는 고 안응묵 옹과, 안병옥(저에게 독학을 장려하며 도와주신 분으로 몇 해 전 작고하였음)님, 박희수 교장선생님(석계리 1139번지), 김영곤(78세, 녹동 35번지)님 등 이런 분들과 함께 답사를 하면서 망부석에 대해 알고자 했더니 일일이 가르쳐 주셨고 그 외에도 문산의 우박마을에 사셨던 박열수 선생님(생존 여부 ?), 신용범 교장선생님 (석계 1리, 현재 석계초등학교 재직) 등을 통하여 의문나는 점은 하나
하나 확인을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이, 녹동에 엄연히 실존해 있는「망부석」을『세 효녀아기바위』 쪽으로 슬쩍 바꿔치기하는 놀라운 재주에 실로 경탄하고 또 한편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울산시 당국에서 1989년 치산서원 유적복원을 완공하므로 울산시민을 사랑하심과 박제상의 충효의열 4절의 정신을 받들고자 하심이 얼마나 지대하신가에 대해서는 가히 감격하옵고 차중에 그 노고와 정성을 진심으로 경하하옵니다. 하지만 어떤 전설상의 바위의 이름은― 그 바위가 위치한 장소와 생김새(모양)와 전설이 형성될 시기의 국민(주민)들의 정서― 가 모아져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장의 전설은 곧 현존하는 그 주민들의 이상과 꿈이며 더욱 나아가서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하옵기에 필자의 이 글을 읽으실 때 저자(著者)의 놀라는 심정을 이해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필자는 이 책에서 은을암(隱乙岩)이나 율포(栗浦)나 치산서원 등을 다루고자 하지 않습니다. 단「망부석(望夫石)」에 관련한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추호의 꾸밈없이 전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후부터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의 저서 주인공 <어네스트>의 「큰바위얼굴」처럼 저는 늘 그 바위를 바라보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은 청소년시절의 우리들에게 어쩌면 화두(話頭)처럼 던져진 꿈과 향수(鄕愁)와도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가 수시로 치술령 정상에 올라가 보면 석계초등학교에서 세워 두었던「망부석」의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 이 표지판을 없애버리고, 근래에 와서는 망부석도 아닌 박제상의 세 딸을 상징하는「세 효녀아기바위」에다「망부석」이라 각인까지 하여 놓고는 울산지방문화재기념물 몇 호라는 표지판까지 세워 두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은 얼마 전 한 친구와 같이 치술령에 등산을 갔다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처음에는 경악했지만 나중에는 울산시 당국의 그 충정을 이해했습니다. 경주시에서는 말로만 충효열(忠孝烈)을 외치고 신라문화제(新羅文化祭) 때마다 치술신모(鵄述神母)를 추모(追慕)하는 가장행렬(길놀이)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신모(神母)의 상징인「망부석」을 기념물이라든가 지방문화재자료로 지정조차 하지 않고 있는데 비해, 울산시에서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투입하여 치산서원을 복원하고는 심지어 경주 녹동지역의 망부석마저 바위이름을 바꿔가며 울산시쪽인 만화리로 옮겨 놓았구나 생각하니 충효의열 4절(四節)을 숭앙하는 울산시의 시민 사랑하는 그 정신에 감격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어느 쪽 누구든 간에 박제상의 충절과 그 가족의 효와 열을 그토록 기리고 있다는 사실 앞에 같은 한민족으로서 경상남북도의 지역 구분을 떠나 경하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망부석」의 위치를 변동시키지 말고 실재(實在)하는 그대로 두고서도,「세 효녀아기바위」만 같고「망부석」은 녹동 산 161번지 치술령 남동쪽 바로 아래 있다고 사실 그대로를 밝혔더라면 좋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아무런 하자가 없을 터인데 왜 구태여 있는 바위를 두고 다른 바위를「망부석」으로 만들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제가 석계 시래마을에서 태어나 망부석을 바라보며 자랄 때였습니다. 가난한 나에게 강의록을 사주면서까지 혼자서 공부해 갈 수 있도록 배움에 도움을 주신 고 안응묵(安應默) 옹이나 그 분의 자제인 안병옥 선생의〈향토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저는 이 실체만은 꼭 밝혀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만약 사실이 사실로서 밝혀진다 해도 울산시 당국의 박제상가 4절(四節)을 현양하는 정서에는 조금도 피해가 되지 않을 줄 믿습니다. 오히려 울산시민께서도 녹동쪽의 18미터가 넘는 높은 바위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고 울산시를 바라볼 때면 이 바위가 확실한「망부석」임이 실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필자는 본인을 데리고 일일이 답사해 가며 설명해 주신 그 분들의「망부석」에 대한 가르침을 저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체를 왜곡함을 보고 그냥 둔다면 고향산천을 배신하는 배은망덕과 같다는 생각과 함께 녹동·석계·외동 주민들이 한결같이 믿고 있는 망부석에 대한 그 정서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와 관련된 책자를 가능하다면 모두 찾아 읽어 보고 나름대로 연구한 결과, 저에게「망부석」을 가르쳐 주신 고인이 되신 여러분과 생존해 계시는 여러분의 그 말씀들이 옳았으므로, 만화리쪽의 바위를 망부석이라 믿고 계시는 분들께 올바른 글을 써서 참고로라도 일독하게 하는 것을 천명으로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만화리쪽에「망부석」이라 각인해 둔 그 바위 세 개는, 박제상의 세 딸의 몸이 굳어 바위가 되었다 하여「세 효녀아기바위」라고 분명하게 지금도 민간에 구전되어 오고 있습니다. 다만「세 효녀아기바위」라는 글이 문헌에 없다고 하여 그 바위를 '「망부석」이라고도 하고 일명「베틀바위」라고도 한다' 하는 1934년판『울산읍지』 3쪽의 망부석(望夫石) 관련 대목을 근거자료로 제시하는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문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귀이맹금망부석좌우유이석시이녀신화운」
<歸而盲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눈앞이 캄캄하여 돌아갔다. 지금의 망부석 좌우에 바위가 둘 있으니 두 여식의 몸이 화하여 된 것이라 이른다」
{{ 이상도. 1996. 「박제상의 渡倭時 發船處에 관한 연구」『慶州文化』제2호. 경주문화원. 149∼183쪽. }}고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바위는 사실 저가 듣기로는「세 효녀아기바위」이지 베틀바위가 아닙니다. 그 베틀바위는 실제로 박제상 처자(妻子)가 주거했던 치술령 정상 북편 바로 아래에 위치한 베틀처럼 생긴, 경주 일대를 바라보고 있는 바위 셋을 두고 말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남서편 국수봉 은을암(隱乙岩)을 바라보고 있는 치술령 만화리쪽 그 바위는 거듭 밝히지만 '박제상의 세 딸(아기(阿奇)·아영(阿榮)·아경(阿慶)도 함께 치술령에서 아버지를 기다린 효녀'라 하여「세 효녀아기바위」라 하였습니다. 나중에 맏딸 아기(阿奇)와 셋째딸 아경(阿慶)이가 어머니와 같이 떨어져 죽은 후 새가 되어 은을암에 숨었으므로 그 은을암을 마주하는 이 바위 밑에다 시신을 묻었으므로 맏딸 아기의 이름을 붙여「아기(阿奇)바위」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또는「세 처녀바위」 혹은「세 공주바위」라고도 불리는 것은 세 처녀가 산정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공주라는 것은 처녀를 미화시켜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전해오는 이 바위의 명칭을 필자는「세 효녀아기바위」라고 칭하기로 했습니다.
{{ 외동읍 석계 2리 시래마을의 고(故) 안응묵 옹. 우리 부친보다 2세 밑이니 살아 계시면 91세임. 같은 마을의 안병옥씨는 61세임. 김호곤은 필자의 4촌형님, 관명은 종석이며 생존했다면 93세. 김영곤은 78세로 녹동에 거주하며 필자의 6촌형님, 녹동리 박동수는 현재 50세로 그는 윤병길(99세, 녹동) 옹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함. }}
『울산읍지』 1934년도판의 그 내용만 가지고 한결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심히 의심이 갑니다. 그럼 지금부터 망부석의 그 두 곳의 진위를 짚어봅시다.
망부석 그 두 군데의 진위(眞僞)
우리는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울산읍지』에 기록한「망부석」은 엉터리요, 그것을 근거로 울산시 두둥면 만화리에 있는「세 효녀아기바위」를 망부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임을 알았습니다.
지금부터 이 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 몇 가지를 제시하여 밝혀 보고자 합니다.
1)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그 시에는 박제상의 가족은 금성(金星) 가까이 있었다.
박제상 가족은 박제상이 고구려의 보해를 구하려 가기 전까지는 삽랑주( 良州) 간(干:태수)으로 양산에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그의 가족이 이사를 하여 수도인 금성 가까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내용들은 많습니다.
아직도 울산쪽의 일부 인사들은 당시 박제상의 집은 양산에 있었고 그 부인의 친정집이 두동면에 있었으므로 박제상의 도왜(渡倭)할 시에 부인은 두동면 만화리 어디에 있었다고 합니다. 부인은 친정집에서 매일 치술령을 오르내리며 남편을 기다렸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 과연 그때 부인은 지금의 두동면에 있었을까요?
《제1증명》'역사서'에서
『삼국유사』 98쪽 위에서 15번째 줄부터 읽어보면 박제상의 도왜 직전 상황을 대강 기록한 후 같은 책 100쪽에서 그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므로 전후 사정을 자세하게 검토 연구분석해 봅시다.
①-1. 이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탄 채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하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 갯가에 이르렀다.
①-2.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으나 남편은 이미 배위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간곡하게 남편을 불렀다. 하지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에 이르렀다」는 그 내용과 ①-1의 내용을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는 같은 책 100쪽 위에서 10번째 줄의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 이에 망덕사 문 남쪽 사장(沙場)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여 그 사장(沙場)을 장사(長沙)라 불렀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박제상 자택과 왕실이 그리 멀지 않은 부근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박제상 부인이 만약에 왕실과 거리가 먼 양산에 있었다면 박제상이 금성에 있는 왕을 배알하고 말을 탄 채 곧장 달려 율포로 갔는데 어떻게 아내가 남편의 떠났다는 소식을 그렇게도 빨리 듣고 즉시 뛰쳐나와 남편을 뒤쫓아가다 더 이상 지쳐 뛰지 못하자 모래바닥에 발을 뻗대며 길게 부르짖을 수가 있었겠는가?
장사에 쓰러진 박제상의 부인이 양산에서 아니면 두동면 만화리 어디에서 배반 망덕사 부근까지 말을 타고 달려왔단 말인가? 그런데 왜 쓰러졌는가? 말을 타고 왔으면 쓰러질 리 만무하다. 이는 양산이나 두동 만화리 어디에서 배반 앞까지 와서, 말을 타고 달려가는 남편의 말을 뒤쫓아 왔다면 말이 쓰러지지 않는 이상 이런 상황은 절대 불가하다.
② 그렇다면 몸소 맨발로 남편을 보고 뒤를 쫓아갔다는 이야기인데, 여인의 몸으로 특히 아이 셋을 낳은 부인의 몸으로 남편이 말을 타고 뛰어가는 것을 보고 그 즉시 뒤를 쫓아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하자. 달렸으면 얼마를 달려 갔겠는가? 200m? 아니 100m만 힘껏 달려도 그만 쓰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맨발로 달렸다면 만화리나 양산에서 배반 앞 개울까지 달려온다는 것은 누구나 무리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망덕사에서 망덕사 앞 개울까지의 거리는 약 200m도 채 안되는 거리다. 부인은 그 모래사장에서 주저앉아 발을 뻗대며 울었다.
③ 그리고「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는 무엇인가? 율포까지 갔다가 왔다는 내용이 아니라「남편을 쫓아갔으나」 했으므로 남편과 헤어지고 올 때의 상황이 아니라 남편의 뒤를 쫓아 갈 때의 상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인은 배반 망덕사 부근 그 어디에서 남편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뛰쳐나와 남편이 타고 달리는 그 말을 보고 맨발로 남편을 부르면서 곧장 따라갔다는 내용이다. 죽을 힘을 다해 남편을 만나보려 달렸으나 그녀는 그만 200m도 따라가지 못하고 숨이 차서 쓰러졌을 것이다.
④『삼국유사』 같은쪽에 계속 읽어가면「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그 자리에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 한다」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박제상 부인이 남편을 쫓아가다가 쓰러져 일어나지 않고 다리를 뻗은 채 앉아 있었다는데 계속해서 앉아 있었을 것인가? 아니다.
친척 두 사람이 '집으로 되돌아가자'고 부추기며 일으켜 세우니 부인은 "나는 남편 만나보지 않고는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이곳에서 일어날 수 없" 하고 버티며 땅을 치고 통곡하니 그 모습이 너무나 처절하여 대신들이 아래것들을 시켜 말을 가져 오게 하여 그 말에다 부인을 태운 다음 남편을 쫓아가게 하였다. {{ 같은 동네에 살던 고 안응묵, 고 안병옥, 신용범, 김영곤의 구전에 따름. }}
①-2-1의「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으나」하는 그 내용은 바로 이 렇게 된 것으로 필자는 추리하였다.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간곡하게 남편을 불렀다. 하지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남편이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로 지금의 망덕사지 부근 어느 절에서 기다리던 부인은 맨발로 장사(長沙)라 일컫는 곳까지 달려가다가 더 이상 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것을 보고 따라 나온 친척 두 명이 집으로 되돌아 갈 것을 권고했지만 그녀는 끝내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친척은 말을 구해서 그 말에 부인을 태우고는 박제상의 뒤를 따라 갔던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구전과 연결하여 결합해 보면,부인을 태운 말이 동해 율포에 다다랐을 시에 이미 남편은 배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돛단배는 순풍을 타고 점점 멀어만 가는데 이윽고 배가 수평선을 넘어가자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그녀는 율포 진리마을 끝에 있는 동뫼라는 바위언덕에 올라가서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오후 늦게야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 부인은 두문불출하며 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라에서 보낸 사자가 박제상 부인을 찾아와 말하기를"그대의 남편 박제상이 신라국을 배반하여 왜국의 신하가 되었으니 당신네 일가는 모두 나라를 배반한 역도의 가정이므로 참형이 마땅하나 보해를 구해온 공로를 감안하여 치술령으로 유배케 하라. "는 왕의 말을 전했다 한다. {{ 앞의 구전과 같음. }}
박제상의 말 무듬 마능(馬陵)
박제상의 말에 대한 전설이다.
박제상은 도왜(渡倭)시 배로 오르기 전 타고 갔던 말의 다리에 서찰을 달아 아내에게 보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자기집으로 되돌아오다 지쳐 북토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하는 마능(馬陵)이 경주시 외동읍 북토 아랫마을에 있다.
말의 회귀성(回歸性)의 정확도를 보아 비록 말이 지치긴 해도 박제상의 본가가 경주 금성 부근 어디쯤이며, 더욱 가깝게는 북토 제내 어디가 아니었을까 추측이 간다. 따라서 결코 박제상의 본가가 도왜(渡倭) 시에는 양산이나 두동 쪽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그가 배를 타고 난 후 말을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박제상이 자기의 그 충정(衷情)을 아내에게 전하기 위해 타고 온 말 다리에 서찰을 달아 보냈다. 말이 자기집으로 되돌아오다 경주 외동 북토 아랫마을까지 와서는 지쳐 죽었다」는 전설의 말무덤이 북토 아랫마을에 지금도 마능(馬陵)이라는 이름으로 실재(實在)하고 있다. 이 전설과 실제의 말무덤을 볼 때 박제상이 타고 있었던 그 말이 자기집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경주풍물지리』북토편 441쪽, 및 마을주민 구전}}그리고 보면 경주 외동읍 북토(北吐) 제내(堤內)리 부근(附近) 그 어디엔가에 혹시 박제상의 본가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도 있다. 또한 구전에 의하면 박제상의 이름이 제내리(堤內里)의 토상(吐上)에서 나온 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제내리의 제(堤)와 토상의 상(上)자를 따서 제상이라 했다 한다. (고 안응묵(安應默), 안병옥(安秉玉) 등의 구전)
망덕사와 장사와 벌지지 및 남방불교전래설
長沙와 伐知知
망덕사 절에서 기도하던 박제상 부인이 남편이 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나와 말을 타고 달려가는 그 남편의 뒤를 쫓다가 지쳐 스러져 모래사장에서 발버둥 쳤다는 전설이 담긴 지역의 이름이 장사와 벌지지다. 과연 그 당시 망덕사가 있었고 불교가 있었는가 하는 의논이 있어 확인해 보니 전혀 맞지 않았다.
망덕사 창건년대와 박제상이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보해(卜好)를 구하려고 떠난 연대와 신라불교의 유입연대와『삼국사기,삼국유사』의 전설상의 연대가 어느 것도 일치되지 않았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아보자.
박제상이 왕의 명을 받잡고 보해를 구하러 가자 왕은 특별히 박제상의 가족을 궐 가까이 불러 나라에서 하여금 보호하게 했던 것은 앞서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인종 때 (1145년)에 만들어졌고『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8년(1281-83년)에 만들어졌으며, 망덕사는 신라신문왕(神文王) 5년(685년)에 창건되었다. 그런데 구전에 의하면, 국대부인은 고구려에 보해를 구하려 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망덕사에서 빌었다 한다.
그렇다면 망덕사가 박제상이 고구려에 보해(寶海: 卜好)를 구하려 갈 때 이미 창건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박제상이 고구려 보해를 구하려 간 그 해는『삼국사기』에는 실성왕 원년(402년)이라 기록해 놓았고,『삼국유사』는 눌지왕 10년(425년)이라 기록하고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 권7과 권9에는 신공(神功) 섭정(攝政) 전기(前期:604년)라 하고 있으며, 신라에 불교가 승인된 것은 법흥왕 15년(528년)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서였다. 그러니 그 어느 것도 서로 사실과 전혀 일치되지 않고 있다. 필자가 추측컨대 아마도 박제상 전설을 다룬 사기(史記)의 기자가 그 연대를 확인하지 않고 전설 그대로를 기록한 것 같다. 그러나 비록 연대수가 일치하지 않고 있지만 나중에 망덕사가 창건되었다 할지라도 박제상의 도왜(渡倭) 당시의 자택은 왕궁과는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은 그 부근 어디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박제상 부인이 죽자 나라에서는 국대부인의 작호(爵號)를 주었고 또한 장례식도 예를 다해 성대히 치루었다 한다. 그런 다음 시신은 망덕사 부근 어디에 묻었으며 그의 혼은 망덕사에 안치(安置) 했다 하는 구전이 있다.
그녀가 고구려에 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기도한 그 어떤 절이 나중에 망덕사로 개칭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排除)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러한 전설이 어떻게 아직도 남아 있을 수 있으며, 망덕사가 박제상 전설과 치술령 망부석 전설과 그토록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이 의문은 불교전래남방설(佛敎傳來南方說)을 이해하게 되면 쉽게 해결된다. 박제상이 내물왕의 왕자 두 분을 구하기 위해 고구려국이나 왜국에 갈 당시에는 아직 신라에 불교가 유입되기 전이라 주장하는 분이 있는데 이는 뚜렷한 불교 남방전래의 증거가 있어도『삼국유사』나『삼국사기』에 공히 불교북방전래설(佛敎北方傳來說)만 기록해 놓고 불교남방전래설은 배제하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강원도지(江原道誌)』와 이능화(李能和;1869-1943)의『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의하면 신라남해왕 원년(서기 4년)에 석가여래의 금상 53구가 강원도 고성의 포구에 와 닿아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안창현(安昌縣)의 현재(縣宰) 노춘(?)이 이 일을 보고하여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셔 놓았다. 지금의 유점사(?)가 그 절이다. 그 뒤 가락국 수로왕 7년 아요디아(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皇玉)이 석탑을 싣고 가야국 해변에 와 닿았다.
(이 석탑은 진풍탑이요, 일종의 불탑으로 파사석탑〈婆娑石塔;삼국유사 '虎溪寺'에 있음〉
. 1873년 고종 10년에 허황후 능으로 옮김; 진풍탑〈鎭風塔〉이라고도 함)이라 한다. 지리산의 운상원(雲上院) 칠불암(七佛菴)하동의 쌍계사. 범왕리의 범왕사(梵王寺), 운수리의 대비부락 천비사(天妃寺), 서기 144년에 세워진 김해군 녹산면의 흥국사(興國寺: 月明寺), 김해군 대청리에 있는 장유암(長遊庵), 김해군 상동면 우계리 광재의 장유화상 영정을 봉안한 장유종(長遊宗) 불조사(佛組寺), 그리고 은하사(銀河寺) 모은암(母恩庵) 부은암(父恩庵) 등등 불교남방전래설을 입증할 자료는 충분하게 있다.
{{『 가락(駕洛)의 역사와 왕조』제1권 170쪽 이하 172쪽까지. 213쪽~216쪽. 김태희저 영진문화사 1993년판. 『한국학 강의』. 60∼64쪽. 최인 저. 백악 문화사. 1978년판. 『眞理에의 架橋』. 127∼130쪽. 김태희 저. 세종출판사. }}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 신라법흥왕이 가락국(駕洛國)을 병합함에 있어서 가야문물(伽倻文物)과 문화(文化)를 흡수하여 비로소 하나의 왕국 형태를 갖추게 되어 처음으로 중국식(中國式) 왕명(王名)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고의적으로 가락국을 극소화하여 역사상에 겨우 명맥
만 유지한 부족국가로만 기록해 놓았다고 본다. 이와 같이 남방불교전래는 소승불교(小乘佛敎)로 북방전래 불교인 대승불교(大乘佛敎)보다 300년에서 400년 이상 앞서 들어왔다. 즉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보다 324년이 앞이 있고,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보다 336년 앞서 있으며, 신라법흥왕 15년(528년)보다 무려 480년 앞서 유입되었다. 필자가 추측컨대 그때부터 삼남 각지에는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보며 신라가 가락국을 병합함과 동시에 가락국 문화 퇴치와 가락정신 말살(抹殺)을 위하여 가락불교의 신앙을 법으로 금하였던 것 같다.
그렇게 가락 불교를 고의적으로 배척하다 보니 북방전래 불교도 백제보다 144년이나 늦게야 이차돈의 순교로서 비로소 승인(承認) 하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를 미루어 보아 박제상이 고구려에 출국할 당시에도 신라는 불교가 있었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터무니없는 전설이 전래해 올 리 만무할 것이다. 비록 박제상의 본가가 배반 망덕사 그 부근이 아닌 그 어느 곳에 있었다 해도 치술령 정상에 있는「망부석」과「베틀바위」와「세 효녀아기바위」의 위치는 불변이다. 박제상 부인이 머물었던 치술령 정상의 움막집터도 불변이다. 부인은 치술령 정상에 유배되어 갇힌 몸이 되었음은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몸이 갇힌 사람은 자기 본가가 어디에 있었느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산정 어디에 움막집을 지었느냐가 지금은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망덕사지(신문왕 5년, 서기 685년 창건)는 경주 배반에 있고 그 인근에 장사(長沙)와 벌지지(伐知旨) 표석판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위에서 박제상이 도왜시(渡倭時) 그의 가족은 신라국 서울 금성 부근 어디인가 있었으며 특히 배반이나 북토 제내 어디였을 가능성은 매우 농후합니다. 따라서 만약 그의 가족이 갇히지 아니 했었다면 울산 두동쪽이 아니라 경주 배반 어디에 있어야 합니다. 배반에서 외동· 석계· 녹동을 통하여 치술령으로 오르내리고 했어야 하지, 어찌 양산이나 두동의 만화리 울산쪽이라고 하겠습니까?
박제상의 부인은 치술령(鵄述嶺) 정상에 유배되어 있었다.
국대부인은 어떻게 매일 바위위에 올라가서 동해를 바라보며 남편의 무사귀국을 빌었을까?
국대부인은 물론 세 딸과 문량은 만화리 어느 민가에서 살면서 매일 치술령에 올라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삼국사기』이병도 역. 권 제45. 열전 박제상. 415쪽 하단부터 416쪽 상단 부분을 읽어보십시오.
「고구려는 큰 나라요 왕 역시 어진 인군이므로 신이 한 마디의 말로 깨닫게 할 수 있지만 왜인(倭人)같은 것은 구설(口舌)로 달랠 수 없으니 거짓 꾀를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하여야겠습니다. 신이 저곳에 가거든 대왕(19대 눌지왕:訥祗王, 서력 417즉위, 41년간 재위)께서는 신에게 나라를 배반한 죄로 논정(論定)하여 왜인들이 알게하소서」했다. 그렇게 부탁을 받은 왕은 약속대로 그 가족을 반역자의 가족으로 몰아붙였다. 박제상을 반역죄로 논정하면 그 집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모두가 반역자 가족이 되고 패가망신(敗家亡身)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왜인들이 염탐하러 왔을 때 박제상 가족은 나라를 배반한 죄로 구금(拘禁)되거나 유배(流配)가 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토록 해야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박제상 가족들에게는 사실과 다르게 즉, 정말 남편이 왜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게 해야 했습 니다. 그래서 구금· 유배시킨 곳이 바로 치술령 산정을 택하게 된 것으로 추리할 수 있습니다. 가두어 두어야 할 그리고 갇혀 있어야 할 박제상의 가족이 어찌 자택이나 친정이나 민가에 투숙하면서 여상스럽게 전 가족을 동원하여 매일 치술령 산정을 오르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삼국사기』는 같은쪽에 연이어 그 사실을 더욱 명명백백하게 밝혔으니「바로 왜국으로 들어가서 마치 본국에서 반해 온 자와 같이 하였는데 왜왕이 의심(疑心) 하였다. 」하였고, 같은쪽 위에서 15번째 줄에는「(왜왕)은 신라왕이 미해 및 제상의 가족을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는 제상을 정말 반한 자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신라에서는 그 가족을 어디엔가 구금해 두었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또한『삼국사기』는 「왜(倭)의 제장(諸將)이 밀의(密議)하기를 '신라를 멸(滅)한 후에 제상과 미사혼의 가족을 잡아 돌아오자'라고 하였다」고 기록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들은 모두 박제상의 가족이 어디엔가 갇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하권 제45에 있는 414쪽의 박제상과 425쪽의 한자 원문기록을 자세하게 읽어보십시오.
「왜가 드디어 군사를 보내어 신라국경 밖을 순찰케 하고 잡아 놓은 백제인을 풀어 그 사실(박제상 가족이 갇힌 것)을 확인케 하였는데 이 모두를 확인한 후에 그제서야 박제상이 진짜 항복한 줄 알았다. 미해의 가족과 박제상의 가족이 모두 갇혀 있음을 알자 이에 왜왕은 신라를 침습(侵襲)
하려고 박제상과 미해를 장수로 임명하고는 의견을 물었다. 그때 왜의 모든 장군이 입을 모아 '우리가 신라를 멸한 후에 박제상과 미해의 처자를 잡아오겠다. ' 하니 박제상은 '저는 벌써 부모처자를 깨끗이 포기했으므로 전혀 보고 싶지가 않으니 더이상 신라쪽 저희 가족을 염려하여 구
금을 풀고 구해오는데 신경을 쓰시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박제상은 미해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서 물고기사냥을 하면서 즐기니 왜인이 그것을 보고는 저들이 진짜 부모처자를 모두 잊은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갇힌 바 되었다는 기록이 엄존하는데, 양산에서 치술령으로 혹은 두동 칠조리나 만화리에서 매일 치술령을 오르내렸다고 주장하면 되겠습니까?{{ 지난 4월에 망부석을 답사했을 때 울산에서 왔다는 60대의 등산객 4명은 박제상의 부인이 친정집이 있는 두동 어디에서 매일 치술령을 오르내리며 남편을 기다렸다고했다}}
거기다가 그것이 다른 장소라면 몰라도 남서쪽 국수봉 하늘을 바라보고있는 치술령 서쪽 줄기의, 정상에서 300여m 아래에 있는 산중턱의 4m 20cm의 바위를 두고「망부석」이라 고집해서는 안되지요. 치술령 정상 바로 이마에 18m 80cm의 높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올라서면 동해 천지(天地)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율포니 방어진이니 장생포는 물론 대마도의 목도까지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는「망부석」을 두고 말입니다. 그리고 기다린다는 자체도 그렇습니다. 매일「망부석」 바위에서 어린 자식과 머물면서 기다렸다는 것이 되는데, 모르긴 해도 어린 문량을 데리고 험난한 잿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기엔 매우 힘이 들고 사실상 불가능하였을 터인 즉, 그 가족은 분명 치술령 어딘가에 갇힌 몸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앞뒤 전후가 맞는「망부석」이 될 것입니다.
영해박씨 종친이라는 치산서원 관리인은 울산 만화리쪽에 박제상의 처가집이 있었노라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그분께서도『울산읍지』를 믿는다면『삼국사기』나『삼국유사』의 기록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국대부인 김씨가 남편 박제상을 만나기 위하여 집에서 달려나온 곳은 양산도 아니요 울산도 아니며 경주 곧, 금성(金城)의 어디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금성에 살던 그녀의 가족은 남편이 떠난 후에 양산이나 울산의 만화리 어딘가로 이거했을 리 만무합니다. 천에 하나 그곳에 있었다 해도 그녀의 가족은 이미 갇힌 몸이기 때문에 치술령 산정을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갇혀 있어야 할 박제상 부인이 치술령에서 매일매일 기도하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치술령 어딘가에 그 가족이 구금되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즉, 그 갇힌 곳이 바로 치술령 산 어디엔가가 아니고는 결코 매듭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가족이 갇힌 곳은 치술령 정상 일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눌지왕은 사실 가두어 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찌 할 수 없 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 가두어 둘 입장이면, 율포가 가장 잘 보이고 동해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두어 남편을 기다리는 박제상의처를 위로하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율포로 떠나간 남편은 또 율포로 돌아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녀를 위해 치술령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치술령에 가두어 놓을 요량이면 지금의 녹동 산 161-1번지의 가장 높은 정수리의 바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배려하였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장생포 일대의 바다만 겨우 보이는, 그것도 남서로 뻗은 동해의 반대쪽인 서편 줄기 7부능선쯤의 만화리 낮은 바위에서 보도록 했겠습니까? 박제상 부인인들 그곳에서 동해를 보려했겠습니까? 동해 일대를 한눈에 모두 볼 수 있는 확 열린 치술령 정상 동쪽의 높디높은 그 바위를 제쳐 놓고 말입니다.
박제상 부인이 기거했던 움막집은 치술령(鵄述嶺) 어디에 있었을까?
매일 바위에 올라가 바라보았다면 박제상부인의 거처는 치술령 정상어디에 있었다.
그 다음 알아야 할 것은, 녹동쪽 바위에서 동해를 바라보았다면 그곳과 인접한 곳에 움막집이라도 지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무어라 하여도 집과 식수(食水)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족이 치술령에 거처할 만한 장소 중 가장 유력한 곳이 있다면 곧 이 식수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일 것입니다.
만화리에 있는「세 효녀아기바위」 일대에서 식수 해결 처를 찾아 이곳 저곳 다 다녀보아도 샘터는 없었고, 그 바위가 있는 북쪽 100m쯤에서 진풀이 난 뻘이 있었지만 그곳에다 샘을 판다 해도 수량(水量)이 모자라고 뻘물이라 냄새가 나서 식음수로 하기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처럼 치술령 정상 그 어디에도 식수를 해결할 만한 샘터가 없는데 유독 정상에서 그리 멀지 않는 북쪽 산등성의 오솔길을 타고 한 100m 정도 내려가면「베틀바위」가 있고 좀더 내려가면 평지가 있습니다. 평지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비상 헬기 착륙장을 만들어 놓았으나 더이상 관리를
하지 않아 지금은 숲이 우거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평지 동쪽 아래엔 계단식 텃밭 터가 있으며 이 밭의 급경사진 동쪽 바위틈에는 사시장철 차디찬 샘물이 퐁퐁 솟구치는 참샘이 있습니다. 정상 부근 그 어디에도 먹을 만한 샘물은 없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머물고 살았을 움막집을 어디에 지었을까요? 과연 그 장소가 어디일 것 같습니까?참샘 바로 위에는 움막집을 지을만한 좁은 평지가 있고 바로 뒤에는 바람막이가 되는 산이 가리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움막을 지었던 흔적뿐만 아니라 지금도 등산객들이 천막을 쳐서 야영을 하고가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때 아마 왕은 박제상의 부탁대로 거짓 반역죄로서 문초하되 영문도 모르는 그 집 가솔들에겐 사실처럼 느껴지게 했을 것입니다.
"가족 모두에게 참형(慘刑)을 가함이 마땅하나 박제상이 내 아우 보해를 구해온 그간의 공을 감안하여 그가 비록 반역한 뒤 도망하여 왜나라 신하가 되었다지만 옛정을 생각하여 먹고 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도록 움막을 짓고 식량을 보급해 주겠으니 그리 알고 치술령 정상에서 생활하도록
하되 산하의 민가로 내려와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니라. "하고는 치술령 정상 참샘 위에 움막을 짓도록 명하였을 것입니다. 임금님은 말로는 반역죄로 몰아 세웠으나 속 깊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부인의 그 애절한 심중을 헤아려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내심 각가지 배려를 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동해가 잘 보이고 박제상이 떠나간 율포가 가장 잘 보이면서도 왜인에게는 박제상의 가족이 반역죄로 유배된 것을 알릴 수 있는 그런 위치를 물색토록 하였을 때, 그곳은 바로 치술령 참샘 위의 따뜻한 양지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 참샘터로 인해 이 물이 흐르는 골짜기의 이름을 참물래기(찬물래기)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국대부인이 남편의 무사귀국을 간구한 기도처는 과연 어디일까?
박제상 부인 김씨는 남편이 신라국을 배반하고 왜국으로 도망갔다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치술령 정상으로 유배되자, 이 누명을 벗어날 길은 남편이 하루 속히 신라국으로 돌아와 왜국의 신하가 아니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므로, 더욱 간절하게 남편이 미해를 구하여 신라국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높은 산정에서 그녀가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드리는 그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동해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기도드릴 수 있는 장소를 선정함에 있었어도①거리가 가깝고 ②동해가 가장 잘 보이고 ③높고 제일 큰 바위를 택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 바위는 가장 정상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또한 동해를 향해 있는 녹동 산 161번지의 그 바위를 기도처로 선정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필자는 봅니다.
베틀바위〔夫人支機石〕는 어느 바위이며 왜 그렇게 불리었을까?
위에서 말씀드린 녹동의 그 바위(망부석)에 국대부인은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치성을 다해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매번 정해진 그 시간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나면 나머지의 시간은 지루하기 끝이 없었으므로 국대부인은 아마 베틀을 차려 놓고 길삼을 하고 베를 짜면서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틀처럼 생긴 바위를 사람들은「베틀바위」라 했고, 국대부인이 산정에서의 단조롭고 지리한 생활을 지탱해 갈 수 있게 한 바위라고 했습니다. (一云夫人支機石)이와 함께 어머니가 산정의 바위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을 그 순간 아기(阿奇)·아영(阿榮)도 교대로 베틀에 앉아 베를 짜며 세월을 보내며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베틀바위」는 주변의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면 베틀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이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3개의 바위가 일렬로 나란히 있는데, 이를 베틀과 비교하면서 세심하게 살펴보면 맨 앞에 있는 가장 큰 바위는 베틀의 용두머리 앞 기둥시침대에 해당되며 3계단으로
서 바위의 높이가 7m나 되고, 중앙의 잉아와 놀림끈과 가로대가 있는 바위는 성탑(城塔)처럼 짜여 베를 말아 쌓아올린 듯 12계단의 두루마리 축을 이루고 있으며 그 높이가 5m입니다. 그리고 뒤쪽 맨 윗쪽 바위는 뒷기둥 말코 앉을깨에 속하는 바위로 그 높이가 약 2. 5m로 제일 작습니다.
필자가 어릴 때였습니다. 어느 해 치술령에 산불이 났습니다. 고목들이 모두 불타고 큰 나무가 자라지 않았으므로 그 바위를 멀리서 바라보니 흡사 베틀처럼 생겼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그 주변 일대의 나무를 베어 버리고 바위를 가꾸면 그 베틀 모습을 우리는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
다. 울산시 두동면 만화리 그쪽의 바위는 저의 판단으로는「세 효녀아기바위」이지「베틀바위」라 하기도 어렵고 게다가「망부석」이라 칭하기에는 너무 큰 무리와 비약이 따른다 여겨집니다.
딸들은 왜 어머니의 자살을 막지 못했으며 둘째 딸 아영이가 따라 죽을 수 없었던 이유는 ?
제가 들은 전설에 의하면, 그후 미해(未斯欣)이 돌아왔으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국대부인은 더욱 열렬하게「망부석」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치술령 산신이 나타나,"그대 남편은 살아오기 심히 어렵다. 만약 살아온다면 10월 3일 대낮에 흰 구름이 동해에서 솟구칠 것이고, 죽어 혼백이 돌아온다면 붉은 구름이 솟구칠 것이니, 그때는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왕이 보내는 특사를 따라 아이들을 데리고 금성 자택으로 가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대부인은 10월 3일 신령님이 일러준 그날 아침부터 치성을 드리던 그 바위 위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며 동쪽 하늘에 흰 구름이 솟아오르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그만 붉은 구름이 솟아오름을 보고는 너무나 기막히고 분해 투신자살한 것이라 했습니다. 다른 이야기로는, 부인의 몸은 굳어 바위가 되었고 혼(魂)은 새가 되어 남편이 있는 왜(倭)나라를 향해 날아갔다고도 합니다. 그때 만약 딸들이 함께 있었다면 어머니의 죽음을 극구 말렸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투신자살할 그 시에 어린 문량과 딸 셋은 베틀바위가 있는 참샘터 위 움막집에 있으면서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어떻게 된 것인가 염려되어 큰딸이 바위쪽으로 가니 셋쩨딸도 뒤따라 갔습니다. 가서 보니 어머니가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원통하고 답답함을 풀길 없어 큰딸이 떨어져 죽으니 셋째딸도 언니 뒤를 따라 눈을 감고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몸이 굳었다는 전설은 없고) 새가 되어 비조(飛鳥)마을 위로 날아가 국수봉 아래 있는 바위 속으로 들어 갔으므로 사람들이 그 굴을 은을암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때 아영은 기거처(寄居處:움막집)에서 어린 남동생 문량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언니가 어머니를 모시고 올 줄 알았는데 언니와 동생이 영 돌아오지 아니 하니 문량이를 업고 망부석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어머니와 언니와 동생이 모두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그때 자신도 죽으려 하였으나 등에 업혀 있던 어린 동생이 "누나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며 어머니와 누나들을 누가 묻어 주겠니?" 하기에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문량이는 아버지의 유일한 핏줄이며 영해박씨의 종손(宗孫)이라 대가 끊기게 되므로 어쩔 수 없이 돌아서려니 눈앞이 캄캄했다고 했습니다.
『울산읍지』의 내용대로라면,
아영이가「나마저 죽고 나면 어머니와 언니와 여동생의 시신을 누가 거두어 묻을 것이며 남동생 문량이를 누가 키울 것인가」 하고 어머니 시신을 묻을 염려를 했고 언니와 여동생을 묻을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이 아영의 염려한 말을 새겨 보면 부인의 몸이 굳어져 망부석이 된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다 동해를 바라보며 떨어져 죽은 시신을 바라보고 염려했음이 틀림없고 기다리다 떨어져 죽은 그 바위를「망부석」이라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만화리 쪽 그「세 효녀아기바위」는 뛰어내려도 다칠 수는 있어도 죽을 만한 높이가 안 되는 4m 20cm입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결코 만화리의「세 효녀아기바위」를「망부석」이라 주장하기에는 너무 큰 무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필자가 위에서 밝힌 여섯 가지 사실은 비록 유추(類推)한 것이라고는 하나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결론(結論)
1) 망부석은 극일사상의 상징이다.
1934년 그 당시 어떤 분이『울산읍지』에 그렇게 기록하였으며, 누가 그렇게 기록하도록 명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누군가가 고의적(故意的)으로 읍지의 독자로 하여금「망부석」바위와「베틀바위」를 혼돈(混沌)하도록 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 전역의 이름있는 성지(聖地)나 산줄기마다 찾아다니며 그 맥이 흐르는 중심지에 쇠말뚝을 쳐서 한민족의 정기를 끊어 놓으려 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명 인물의 운기(運氣)를 차단하기도 했던 뻔뻔스러운 작태를 벌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김해에는 김수로왕의 운기를 차단하기 위해 구지봉(龜旨峰)의 거북머리를 잘라 도로를 낸 일이 있었고, 김유신 장군의 운기가 서라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여 그 산 허리를 잘라 철로를 내었습니다. 전국 처처 유명한 산맥마다 그들이 박아 놓은 쇠말뚝을 우리 향토사학자들이 일일이 찾아 뽑아내는 것을 지상보도나 TV방영을 통해 본 일이 어저께 일처럼 생생하지 않습니까? 가장 비근한 하나의 실예로 구지봉의 거북머리를 몸체와 연결하는 복원사업을 몇 해 전에 김해시에서 했던 일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횡행하던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1934년판의『울산읍지』라면 그 전설편의 진실을 더 논하여 무엇하리오. 일제 식민지시대에 작위적(作爲的)으로 만들어진 국사는 잘못된 국사라 하여 안호상(安浩相:1902년 ?) 전 문교부장관을 중심으로 재야(在野) 사학자(史學者)들이 국사바로찾기운동을 벌여 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립(李有立)·문정창(文定昌)·박창암(朴昌岩)·임승국(林勝國)·최 동(崔 棟) 등 사학자(史學者) 다수분과, 경주에서는 김세환(金世煥){{ 인왕동 신라한약국 경영, 81세}} 선생도 그 후원자로 활약해 왔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국사바로찾기운동을 벌이면서『자유지(自由誌)』라는 월간 책자를 발간해 가면서까지 내 나라의 바른 역사를 찾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울산시에서 황국신민시절 당시에 만들어진 읍지를 근거(根據)로 박제상의 충효의열 4절(忠孝義烈四節)의 정신을 선양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임의로「망부석」의 장소까지 옮겨가며 왜곡되게 뿌리내리려 해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자신의 남편을 화형시킨 철천지 원수의 나라가 만든 그 읍지를 근거로 해서 충효의열(忠孝義烈)의 정신을 기리겠다는 그 발상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진짜「망부석」이 통탄할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1934년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말과 글은 물론 우리 혈통의 뿌리를 뽑기 위해 창시개명(創始改名)까지 하던 시절이 아닙니까? 그런 상황이라면『울산읍지』의 기록자가「망부석」인들 바로 기록하였을리 있겠습니까? 반일(反日) 감정의 도화선이 될 그 전설의 바위에 손을 쓰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동해와 일본을 응시(凝視)하고 주시하며 있는 망부석은 없애버리고 서쪽으로 뻗혀 국수봉을 향하고 있는 보잘 것 없는「세 효녀아기바위」만을「망부석」과「베틀바위」라 고의적(故意的)으로 기록한 것이 아닌가 심히 의혹이 갑니다. 그런데 울산시에서는 어찌하여「세 효녀아기바위」에다 망부석이라 각인(刻印)을 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돌이「망부석」이면 망부석이라 각인을 하지 않아도 망부석인데 돌에다「망부석」이라 각인을 할 필요성이 전혀 없습니다. 반드시 여기에는 망부석이 아닌 바위를 망부석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의적인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 무심중에 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돌이 진짜 망부석이라면 하필이면 그렇게 각인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형문화재 원형보존 차, 함부로 손을 델 수 없도록 보호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연의 훼손이요. 유적 유물의 훼손(毁損)이기 때문입니다. 필자로선 이해가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망부석 전설은 확고한 반일(反日) 정서(情緖)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잔인함을 천하 조선인에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입니다. 어떻든 필자로서는 일제 치하에서 고의적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있는 망부석을 배제(排除)하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세 효녀아기바위」를 치술령의 망부석이라 꾸며 놓은 것이란 의구심이 풀리지 않습니다. 유형문화재인 전설의 바위는 무형문화재(?)인 전설과는 달라 불변(不變)입니다. 전설은 어떤 형태로든 변하지만 실물로 존재하는 바위는 자자손손 확인되고 또 확인된 바위이므로 결코 그 바위의 명칭(名稱)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치술령 망부석같이 각처에 알려진 바위는 더욱더 말입니다.
울산시에서 다른 충분한 자료도 없이 일제시대인 1934년도에 펴낸『울산읍지』를 근거로 하여 망부석을 만화리쪽의「세 효녀아기바위」를 망부석이라 고집한다면 이는 일본의 교활한 간계의 함정이 빠진 것입니다. 만화리쪽「세 효녀아기바위」를 망부석이라 한 것은 망부석의 본래의 의미와 신령한 위력을 무색하게 만들려고 고의적으로 꾸민 일이기에 반드시 언젠가는 울산시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망부석은 일본과 한국과의 과거시절에 있었던 국제관계의 위상(位相) 문제를 아울러 담고 있는 전설의 바위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우리의 외교권을 탈취한 후 우리의 영토인 광활한 북간도를 1909년 소위 청일 간도조약을 맺고 남만주 철도개설의 이권을 조건으로 간도 땅을 청국에게 팔아먹었습니다.
{{ 노계현 저『조선의 영토』1997년. 한국방송대학출판부. }}
해방 이후에도 교활한 그 근성은 변함이 없어 독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하며 시시때때로 시비를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근성은 아득한 그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망부석 전설이 곧 일본의 그 간교성과 직접적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한일관계가 없다면 경남이면 어떻고 경북이면 어떻습니까?
아득한 옛날 우리의 임금이 왜왕의 간계에 빠져 어린 왕자를 왜국에 보냈습니다. 보낸 후에 왜는 신라의 왕자를 볼모로 하여 가진 이권을 챙겼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돌려보내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신라왕실의 수치요 수모였습니다. 왕은 못내 왕자를 그리며 가슴아파하다 결국은 병이 되어 돌아가시고, 그 뒤를 이은 새로운 왕이 아버지의 원한을 풀고 형제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 한 충신이 자기의 생명을 바치고자 그곳에 가서 왕자를 구해 고국으로 보낸 후 자신은 결국 화형을 당했습니다.
화형당한 만고충신의 가족이 365일 올라가 왜국을 원망하며 그가 돌아오시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기도드리던 바위가「망부석」입니다.
님을 그리던 연약한 아녀자가 높디높은 치술령 산정에서 동천을 바라보다가 남편이 불타는 것을 보고 불꽃 속에 들어가서 남편의 혼이라도 신라국으로 모시고 오기 위하여 새가 되고자 떨어져 죽은 바위가 망부석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이 세상에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어머니 뒤를 따라 두 딸이 함께 떨어져 죽은 바위가 망부석입니다.
어머니와 언니와 동생이 죽은 그 자리에서 어린 남동생 때문에 함께 죽지 못하고 되돌아 가려하니 천지기 캄캄했다는 소녀의 피눈물이 저려있는 바위가 망부석입니다. 이「망부석」은 동해를 바라보는 바위어야 하고, 일본을 원망하는 바위어야 하고, 신령한 느낌이 더는 바위어야 합니다. 「망부석」이라는 이름이 아무 바위에다 붙인다고 망부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바위가 서쪽 하늘을 바라보아서야 되겠습니까?
동해가 겨우 보이는 후미진 곳에 있었어야 되겠습니까? 조잡(粗雜)해서야 되겠습니까? 떨어져도 죽을 수 없는 나즈막한 바위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지극히 가난한 한 시인이 수백만원의 빚을 내면서까지 이 책을 내고자 함은 충효의열(忠孝義烈)을 박제상에게서 배우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내가 태어난 내 고장을 사랑하고 내가 어릴 때부터 정신적 지주(支柱)로 삼아 온 망부석에 관련된 문제인 이상, 일제 황국식민사관에 의해 조작된 잘못된 망부석을 보고 글을 쓰는 문학도의 한 사람으로 나까지 몰라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로서는 아무리 해도 안되기에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양심껏 이 고장의 전설의 바위를 사실 그대로 필설로 기록해 둠이 의무요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결코 저의 주장이 경향 각지의 다른 분의 주장과 다르다 하여 저의 이 글이 저만의 독단적인 주장이라 비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의 주장이 아닙니다. 이고장 사람이 믿고 있는 전설 그대로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밝힐 뿐이니 그 누구와도 시시비시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일독하시고 녹동·석계·외동·경주 일원의 주민 중에는 이렇게 전해 듣고 알고 믿고 있는 분이 절대다수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으로 끝내시기 바랍니다. 망부석 위치는 경북 경주시 외동읍 녹동 산 161번지이고 치술령 정상은 녹동 산 161-1번지입니다. 망부석의 높이는 약18m 80cm이고 윗면의 가로길이는 약 11m입니다. 망부석은 치술령 남동쪽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한 바위로서, 날씨가 청명하면 목도(木島)라는 섬이 보이기도 하는 바위입니다. 망부석에 관한 한 그 모든 실체에 대해 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습니다. 이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판단대로 하소서. 모든 것을 분명하게 판단하시고 분명한 선택을 하십시오.
제가 부족하고 비록 용렬하오나 잘못 전해지고 있는 부분을 저에게 알려주시어 극일(克日) 정서를 닦고 있는 망부석을 바로 찾아 세우고자 얘쓰시던 지역의 어르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것을 바로 알고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자 하는 시인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시길 바랍니다.
죄송하고 또한 고맙습니다. 필을 놓습니다.
1999년 5월 일 김대원올림
참고자료
필자가 고인이 되신 4촌 호곤 형님의 말씀을 들어온 전설상의 기록을 그대로 漢譯해 보면 아래와 같다.
"望夫石在 鵄述嶺上新羅訥祗王二年朴堤上死於倭國其妻金氏不勝哀怨落卒二女此峰望倭國哭盡而死婦人爲石魂爲鳥飛去倭國或云長女阿奇三女阿慶皆哭盡而死從母魂爲鳥翔徊國讐峯入岩穴然而二女死爲身埋嶺辛未酉方三岩前一云三孝女阿奇岩惑一云處女公主岩次女阿榮獨不死曰我若從誰埋我母及姉妹乎又誰養我弟文良乎歸而盲今望夫石子未丑方二百步在夫人支機石辛未酉方七百步在三孝女阿奇石隱乙岩在望夫石午未未方十里俗傳朴堤上二女之魂爲鳥飛入岩穴今滴於岩"
"망부석재치술령상신라눌지왕이년박제상사어왜국기처금씨부승애원낙졸이녀차봉망왜국곡진이사부인위석혼위조비거왜국혹운장녀아기삼여아경개곡진이사종모혼위조상회국수봉입암혈연이이여사위신매령신미유방삼암전일운삼효녀아기암혹일운처녀공주암차녀아영독부사왈아약종수매아모급자매호우수양아제문량호귀이맹금망부석자미축방이백보재부인지기석신미유방칠백보재삼효녀아기석은을암재망부석오미미방십리속전박제상이여지혼위조비입암혈금적어암"
망부석재 치술령상 (望夫石在 鵄述嶺上)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에 있다
신라눌지왕이년 (新羅訥祗王二年) 신라 눌지왕 2년에
박제상사어왜국(朴堤上死於倭國) 박제상이 왜국에서 죽으니
기처금씨부승애원낙졸(其妻金氏不勝哀怨落卒) 그의 처 김씨 부인은 원한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떨어저 죽었다
이녀차봉망왜국곡진이사(二女此峰望倭國哭盡而死) 두 계집도 이 산 봉우리에서 왜국을 바라보며 슬픔이 극에 달하여 죽었다.
부인위석혼위조비거왜국(婦人爲石魂爲鳥飛去倭國) 부인은 바위가 되고 혼은 새가 되어 왜국으로 날아 갔다.
혹운(或云)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장녀아기삼여아경개(長女阿奇三女阿慶皆)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 모두
곡진이사종모(哭盡而死從母) 슬픔이 극에 달하여 어머니 뒤를 따라 죽으니
혼위조상회(魂爲鳥翔徊) 혼이 새가되어 배회하다가
국수봉입암혈연이(國讐峯入岩穴然而) 국수봉 바위구멍으로 들어갔다.
이여사위신(二女死爲身) 죽은 두 여식의 몸은
매령신미유방삼암전(埋嶺辛未酉方三岩前) 령봉 남남남서 세 바위아래 묻었다. 일운삼효녀아기암(一云三孝女阿奇岩) 일설에 의하면 세효녀 아기 바위라 하고 혹일운처녀공주암(惑一云處女公主岩) 혹은 처녀공주바위라고 이른다
차녀아영독부사 왈(次女阿榮獨不死 曰)차녀아영은 혼자 죽지 않고 말하기를
아약종(我若從) 내가 만약에 (어머니를) 따라죽으면
수매아모급자매호(誰埋我母及姉妹乎) 누가 나의 어머니와 언니 동생을 묻을 것이며 우수양아제문량호(又誰養我弟文良乎) 또한 누가 나의 동생 문량이를 키울 것인가
귀이맹(歸而盲) 돌아가려니 눈앞이 캄캄했다
금망부석자미축방이백보(今望夫石子未丑方二百步)지금 망부석 북북동쪽 이백보쯤에 재부인지기석(在夫人支機石) 부인의 베틀바위가 있고
신미유방칠백보(辛未酉方七百步) 서서남쪽 칠백보쯤에
재삼효녀아기석(在三孝女阿奇石) 세 효녀 아기바위가 있고
은을암재망부석오미미방십리(隱乙岩在望夫石午未未方十里) 은을암은 망부석남남서 십리에 있다.
俗傳 박제상이여지혼위조(俗傳 朴堤上二女之魂爲鳥) 속전에 박제상 두 딸의 혼이 새가되어 비입암혈금적어암(飛入岩穴今滴於岩) 바위굴속에 날아들어 지금도 바위는 눈물을흘리고 있다
[참고 <三十二方位>1(北=子) 2(子未丑) 3(北北東 =丑) 4(丑未艮) 5 (北東=艮) 6 (艮未寅) 7(東北東= 寅) 8(寅未卯 ) 9 ( 東 =卯) 10(卯未辰 ) 11( 東南東=辰) 12 (辰未巽) 13( 南東=巽) 14(巽未巳) 15(南南東=巳) 16(巳未午) 17(南=午) 18(午未未) 19(南南西=未) 20 (未未坤) 21(南西=坤) 22(坤未辛) 23( 西南西=辛) 24(辛未酉) 25(西=酉) 26(酉未戌 ) 27(西北西=戌) 28(戌未乾) 29(北西=乾) 30(乾未亥) 31(北北西=亥) 32(亥未子)]
[참고 <삼십이방위>1(북=자) 2(자미축) 3(북북동 =축) 4(축미간) 5 (북동=간) 6 (간미인) 7(동북동= 인) 8(인미묘 ) 9 ( 동 =묘) 10(묘미진 ) 11( 동남동=진) 12 (진미손) 13( 남동=손) 14(손미사) 15(남남동=사) 16(사미오) 17(남=오) 18(오미미) 19(남남서=미) 20 (미미곤) 21(남서=곤) 22(곤미신) 23( 서남서=신) 24(신미유) 25(서=유) 26(유미술 ) 27(서북서=술) 28(술미건) 29(북서=건) 30(건미해) 31(북북서=해) 32(해미자)]
동경통지 (東京通誌) 고려 때의 동경의 내력을 적은 책.
고려 때의 동경(東京;지금의 경주)의 내력을 적은 책. 저자 미상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오던 《동경지(東京誌)》를 1669년(현종 10) 경주부사 민주면(閔周冕)이 증수·간행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 3권 3책)》라 하였고, 1711년(숙종 37) 남지훈(南至薰)이 재중간, 1845년(헌종 11) 성원묵(成原默)이 정정하여 다시 간행하였던 것을 1910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가 성씨(成氏)의 판본을 인쇄본으로 간행했는데, 1913년 최남선이 주관하던 광문회(光文會)가 또 활좌본으로 중간하였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여러 차례 간행되었던 《동경잡기》를 1933년에 《동경통지》라고 개칭하여 간행한 것이다. 제1권 족본편(族本篇), 제2·3권 왕기편(王紀篇), 제4권 연혁·강역(疆域)·산천, 제5권 풍속·성씨(姓氏)·호구·전결(田結), 제6권 관직·군류·성지(城池)·창고·봉수·학교·역원(驛院)·도로·방리(坊里)·제언·시장, 제7권 단묘(壇廟)·허림(墟林)·궁실·능묘·불사(佛寺), 제8권 박제형(朴齊珩)의 계림부(鷄林賦), 제9권 역대수관(歷代守官), 제10·11권 명신, 제12권 충의(忠義)·효우(孝友), 제13권 문(文)·사마(司馬)·음(蔭)·무(武), 제14권 유현(儒賢)·일천(逸薦)·명류(名流)·유우(流寓)·은유·기예(技藝)·열녀·고승·도류(道流)·명기(名妓)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문화 및 고려·조선의 역사연구에 중요한 문헌이 된다. 14권 7책. 인본.
동경통지서(東京通志序)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이십삼(二十三)쪽 ~이십사(二十四)
치술령(鵄述嶺) 박제상(朴堤上) 십사(十四)쪽
김종직(金宗直) 의 시(詩)
치술령두망일본점천경해무애안양인거시단요수생여사여음모단장별이사생녕유상견시호천편화무창석열기천재간공벽
(鵄述嶺頭望日本粘天鯨海無涯岸良人擧示但搖手生歟死歟音耗斷長別離死生寧有相見時呼天便化武昌石烈氣千載干空碧)
유호인(兪好仁) 의 시(詩)
孤臣一死答君恩萬里扶桑寒節尊鵄述峰頭三長石愁雲猶帶望夫魂
(고신일사답군은만리부상한절존치술봉두삼장석수운유대망부혼)
동경통지(東京通志) 권 제칠(卷第七)
神母祠 在 鵄述嶺 上 [동경통지 권 7 의 팔(八)쪽 ~ 구(九)쪽
朴堤上妻堤上之入倭也追至栗浦口望舟大哭曰 好歸來堤上回顧曰我將命入敵國莫作再見期及堤上死報至率三女上鵄述嶺東向痛哭而死身化爲石 魂化爲乙至今有望夫石 隱乙庵後人哀慕立祠其山
<박제상처제상지입왜야추지율포구망주대곡왈 호귀래제상회고왈아장명입적국막작재견기급제상사보지율삼녀상치술령동향통곡이사신화위석 혼화위을지금유망부석 은을암후인애모립사기산 >
조선총독부허가 소화팔년십일월 경주향교에서 인쇄발행
三國史記 김영수 번역 (1988년 일신서적 중간)
新羅本紀 55~59 쪽
新羅本紀第三 243·~ 245
列傳 朴堤上 243 ~ 246
三國遺事 김영수 번역
奈勿王 金堤上 기이편 36~40쪽 제1권 75 ~ 76쪽 참조
新增東國輿地勝覽
명문당 간 단기4291년 7월 盧思愼외 5명 편저
권 21 경주 산천 348쪽 치술령 欄 참조
참고문헌
동경통지
동국여지승람
김영수 옮김. 삼국유사 일신서적 출판사
김영수 옮김 삼국사기 일신서적 출판사
정영호 교수님 치술령 登頂記 <교원대학박물관>
임승국. 1986. 「史林」. 『한국고대사논총』. 진영출판사
최 동. 1988. 『朝鮮上古民族史』. 인간사
이병모. 1797. 『五倫行實圖』.
정인보. 1946. 『조선사연구』. 상· 하, 서울신문사
읍지편찬위원회. 1934. 『울산읍지』. 울산읍
김태희. 1993. 『가락의 역사와 왕손』. 1∼9권, 진영문화사
김태희. 1998. 『중국과 일본을 지배했던 우리 겨레』. 부산 세종출판사
안호상. 1992. 『배달· 동이는 동아문화의 발생지』. 뿌리
권낙현. 1993. 『한국인명대사전』. 금성문화사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1995. 『국어국문학 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이민수 옮김. 1995. 『三國遺事』. 을유문화사
박성봉·고경식 옮김. 1985. 『三國遺事』. 서문문화사
이병도 역주. 1997.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문정창. 1978. 『가야사』. 백문당
김재식·김기문 편저. 1992. 『慶州風物地理誌』. 글밭출판사
신용범. 1990. 『내고장 외동읍』. 동진인쇄소
편찬위원회. 1988. 『서라벌명감』. 도서출판 보문당
경주문화원. 1986. 『경주문화』2호 글밭출판사
임승국. 1986.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김세환 외. 1983. 『국사, 광복의 횃불』. 국사찾기후원회
김태희. 1996. 『眞理에의 架橋』. 부산 세종문화사.
최 인. 1978. 『한국학 강의』. 백악문화사
노계현. 『조선의 영토』1997년. 한국방송대학출판부
김대원 올림
박제상 유적의 진위 여부
-울산과 경주를 중심으로-
장성운
1. 머리말
2. 우리역사서와 『일본서기』의 차이
3 박제상 유적지가 있는 곳
1)울산
2)경주
3)양산
4)대마도
4. 박제상 사적 조사보고서
5. 망부석 진위에 대한 논란
6. 결론
1. 머리말
흔히들 울산을 ‘충절의 고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울산이 충절의 고장이 될 수 있는 요인은 신라 충신 박제상의 유적이 울산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산이 충절이 고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 말의 원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박제상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박제상 설화를 보면 박제상은 왕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가 자신을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했고 또 박제상 부인은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가가 죽어 정절을 지켰다. 두 딸 역시 아버지를 기다리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어머니를 이어 목숨을 버려 효를 지켰다.
이에 한 가지를 더 첨한다면 박제상의 아들 박문량은 청빈한 인물로 지금까지 칭송을 받고 있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박제상이 이 나라 최초의 순국열사라고 칭송한다. 사가들 중에는 이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고려 말의 포은 정몽주와 조선 시대 사육신의 절개가 박제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박제상의 행적은 특히 충효를 근본으로 했던 조선시대가 되면 더욱 빛을 내게 된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박제상을 일컬어 ‘신라 시대 으뜸가는 충신’이라고 하였고 정조 도 ‘박제상의 도덕은 천추에 높고 충은 만세에 걸친다’고 칭송했다.
박제상의 행적은 충효사상을 중히 여기는 우리의 관습으로 볼 때 행동 하나 하나가 교훈이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인물의 행적이 남아 있는 울산이 박제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은 최근이다.
물론 박제상의 얘기는 오래전부터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미담으로 실리기도 했고 역사서에서도 언급되었다. 그러나 20여 년 전만 해도 울산 사람들 중 박제상 일가의 행적이 울산에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울산시가 치산 서원 복원을 계획하고 박제상의 유적지에 대한 답사를 한 것이 1987년이다. 당시 박지근 울주군수가 울주군 두동면에 이처럼 훌륭한 유적지가 있는 것을 알고 치산서원을 복원키로 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박제상의 얘기가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울산에 있는 치술령은 유명산이 되었고 요즘 들어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박제상의 설화로 울산이 충절의 고장이 되었지만 박제상의 설화와 유적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밝혀져야 할 것은 박제상의 정확한 성이다. 오늘날 우리가 박제상을 부를 때 사용하는 성씨인 박(朴)은 순전히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의 가장 귀중한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보면 박제상의 설화 내용은 비슷하지만 이 책은 박제상의 성씨가 박이 아닌 김(金)이 되어 있다.
두 번째로 밝혀야 할 것은 치술령(鵄述嶺)의 산 이름이다. 치술(鴙述)은 18대 실성왕의 아들이다. 그런데 눌지왕이 자신을 미워한 실성왕이 죽은 후 실성왕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한편으로 실성왕의 아들인 치술을 지극히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한 것은 치술령 주위 산들이 모두 산으로 불리는데 반해 왜 치술령은 영(嶺)으로 불리나 하는 것이다.
박제상이 일본으로 떠난 장소 역시 아직 분명치 않다.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 편」을 보면 그가 일본을 향할 때 죽음을 맹세하고 처자도 보지 않고 율포로 가 배를 띄워 일본으로 향했다고 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도 이 장면을 놓고 「말을타고 집에 들리지 않고 바로 율포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달려 율포로 달려갔으나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지라 간절히 불렀으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면 멈추지 않고 왜국으로 갔다」고 되어 있어 당시 박제상이 떠났던 곳이 율포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박제상이 일본을 향해 떠났던 율포가 오늘날 정확히 어딘가 하는 문제를 놓고는 사가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당시 신라가 인질을 일본에 보내었다는 것도 우리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옛날에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있었던 인질제도는 대체로 약소국이 강대국의 청에 못 이겨 약조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인질을 보내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역사서를 통해 신라시대 비록 왜구의 침입을 신라가 자주 받기는 했지만 국력이 일본보다 훨씬 강했던 것으로 배웠다. 그런데 왜 당시 신라에서 일본에 인질을 보내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박제상 출신이 어딘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현재 울산은 역사서의 기록과 또 그와 관련된 유적이 울산에 가장 많은 것을 들어 박제상이 울산사람이라고 주장 하지만 경주와 양산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료와 유적을 갖고 박제상이 자기고향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의문 사항에 못잖게 밝혀져야 할 것이 박제상 유적지의 진위여부다. 박제상이 활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은 시간적으로 보면 이미 1천 500여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치술령 인근에는 박제상 설화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망부석과 치산서원, 은월암이 있나하면 신모사 터와 또 박제상 부인이 치술령에 머무는 동안 이용했을 우물까지도 유적지로 거론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유적지 중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망부석의 정확한 위치다. 현재 치술령에는 울산이 주장하는 만화리 쪽 망부석과 경주시가 주장하는 치술령 서편 녹동 망부석 두 개가 있다.
도 도시의 이런 엇갈린 주장 때문에 가장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다. 망부석이 이처럼 두 곳이 된 것은 1987년 이곳을 답사했던 학국교원대학교 교육연구원조사단이 어정쩡한 답변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사단은 망부석 위치와 관련 박제상의 부인이 울산 만화리쪽에 있는 바위와 경주 녹동 쪽에 있는 바위를 서로 번갈아 오가면서 박제상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면서 동해를 바라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경주 쪽에서는 역사서와 지리적 위치 등 을 고려할 때 분명히 경주 쪽에 있는 바위가 박제상 부인이 남편을 기다렸던 망부석이 맞는데도 당시 조사가 울산시의 예산으로 이루어졌고 특히 당시 조단사에 경주 사람들이 거의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내려졌다면서 이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울산시와 경주시는 둘 모두 자신들의 행정구역에 있는 바위가 망부석이라는 안내문을 붙여 놓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각지에 산재해 있는 박제상 유적지를 알아보고 또 1987년 조사 과정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고 울산과 경주 두 도시 간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는 망부석 의 위치에 대한 해결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우리 역사서와 『일본서기』의 차이
박제상의 당시 행적은 우리나라 못잖게 일본 역사서에 잘 남아 있다. 박제상의 행적은 지역적으로 보면 신라 보다 일본에서 더 많았다. 그는 신라에서는 왕에게 인사를 한 후 곧 일본으로 떠났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한 후 궁정에 머물면서 일본 왕을 속이고 미사흔을 신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일본에서 화형을 당했다.
이 때문인지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일본에 많이 남아 있다.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에 못잖게 일본 사람들 중 박제상의 높은 뜻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미사흔을 보낸 후 죽은 장소로 알려져 있는 대마도 사람들 중에는 지금도 박제상을 기리는 사화 단체가 있어 자주 모임을 갖고 박제상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이들은 80년대 후반 망부석이 있는 울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일본에 도착한 후 박제상의 행적은 일본의 주요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신공왕후 편」을 보면 박제상이 당시 조공을 바치기 위해 일본에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8세기경에 쓰인 일본 역사서로 시대적으로 보면 박제상 기록이 올라 있는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비해 훨씬 앞선다. 『일본서기』를 보면 우리 기록과 일부 차이가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비슷한점이 많다.
『일본서기』는 박제상의 순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신공왕후 5년 3월 7일 신라왕은 우레시호쯔, 모마리시찌, 호라모찌를 보내어 조공했다. 그런데 신라가 이렇게 조공 한 것은 앞서 인질로 잡혀 온 미시코찌홋간을 데리고 갈 뜻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코찌홋간이 일본 왕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했다. 이 말을 들은 코찌홋간은 신공왕후에게 나아가 ‘신라의 사자인 우레시호쯔와 모마리시쯔가 나에게 말하기를 저의 국왕이 내가 오랫동안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처자를 몰수해 관노로 삼았다고 합니다. 바라건데 부디 저를 본국으로 돌아가서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황후는 코찌홋간의 간청을 허락하고 카즈라기노소쯔히코를 딸려 보냈다. 그리하여 일행은 대마도에 있는 사우미의 미나토에 머물렀다. 이 때 신라의 사신 모마리시찌는 몰래 배를 마련해 미시칸끼를 태우고 신라로 급히 도망가게 했다. 그리고는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신라의 왕자 미시코찌의 자리에 두고는 미시코찌가 병에 걸린것 처럼 위장하고 소쯔히코에게는 미시코찌는 병이 들어 다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소쯔히코는 사람을 보내 병이 든 왕자를 돌보게 했는데 여기서 그만 거짓이 탄로 나고 말았다. 이에 분격한 소쯔히코는 신라 사신을 체포해 우리에 가두고 불을 질러 타 죽게 했다》
이 글을 보면 일본에 간 사람의 이름이 한자 표기에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음상으로 보면 우리 역사서의 기록이나 일본의 기록에 별반 차이가 없다.
『일본서기』는 박제상을 모마리찌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제상의 다른 이름인 모발과 비슷하다. 또 미사흔을 미시코찌훗칸 혹은 미시칸키라고 표기한 것도 비슷하다.
물론 박제상과 미사흔이 일본에서 헤어질 때의 행동은 『일본서기』에 비해 『삼국사기』가 훨씬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미사흔을 감시하는 왜병을 속이기 위한 방법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는 박제상이 왜의 사신을 속이기 위해 미사흔과 한방에 자다가 박제상이 먼저 밖으로 나와 미사흔이 전날 배를 타고 너무 먼 길을 다니다가 보니 피로해 아직 자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반해 서기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죽였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목도가 일본의 대마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미지수다. 박제상이 죽은 장소에 대해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대마도가 아닌 하카다로 기록해 놓은 것이 많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제곡의 『해사일기』와 신유의 『해사록』에는 모두 박제상이 죽은 장소를 패가대 즉 하카다로 기록해 놓고 있다.
두 역사서의 가장 큰 차이는 당시 미사흔을 환국시키기 위해 일본에 간 사람이 박제상 말고도 우레시호쯔와 호라모찌 등 2명이 더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은 우리 역사서에는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그 진의를 파악할 길이 없다.
더욱이 당시 우리 역사서를 보면 박제상이 일본에 가서 신라에서 국익을 해치는 일을 저질러놓고 쫓겨 온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공식적으로 그를 동행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예측하기 힘들다.
현재 대마도에는 박제상 순국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있다. 이 비는 치술령 답사를 마친 황수영․정호영씨가 1988년 8월 8일 대마도로가 세운 것이다. 이 비를 세울 때 일본인들도 다수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박제상 유적지
박제상은 신라 19대 눌지왕 때 활동하다가 일본에서 순국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보면 이미 1천500여 년전 사람이다. 역사서를 보면 그가 특사의 예를 갖추어 왕자를 데리고 오기 위해 고구려로 간 것이 417년으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가 활동했을 당시 유적과 유물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지금까지 박제상의 행적을 조사한 학자들은 그를 박(朴)씨로 보고 있다. 우선 그의 족보를 보면 신라를 세운 혁거세의 9세손이고 5대 파사왕검의 6세손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또 그가 삽량주(지금의 양산시)의 간(干)을 역임했다고 해 놓았다. 지금의 직급을 치면 양산시장이 된다. 그는 간으로 있을 때 『부군지』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의 한권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지금은 그 책이 없어 책의 내용마저 알 수 없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유적지는 설화와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후세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해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유적지는 그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울산과 경주 그리고 양산에 주로 있다.
이를 유적들이 있는 곳을 지역별로 나누어 보면 아래와 같다.
1)울산
•치산서원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두동면 만화리 산 30-2에 있다. 치산서원은 조선 21대 영조가 박제상과 부인 김씨 그리고 두 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다. 사당 내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와 부인을 모신 신모사 그리고 그의 두 딸을 모신 쌍정여가 있었으나 조선 말기 서원 철폐로 모두 없어졌던 것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울주군이 1991년에 다시 복원한 건물을 보면 충렬묘, 신모사, 쌍정여가 있고 또 관설당도 복원되었다.
치산서원은 조선시대에는 지방 서원의 역할도 했으나 대원군 때 철폐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울주군은 매년 치산서원 보존회를 통해 이곳에서 춘향제를 올리고 박제상과 그 가족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원내 에 박제상 기념관도 건립했다.
•망부석
김씨 부인이 일본으로 간 박제상을 기다리면서 동해를 바라보다가 박제상이 돌아오지 않자 바위가 되었다는 돌이다.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이 바위는 치술령 정상에서 서편으로 조금 내려오면 있다. 만화리 사람들은 이 바위가 흡사 베틀처럼 생겼다고 해 ‘베틀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바위의 크기는 가로 7.3m, 새로 4. 2m, 높이 4. 75m로 만화리에 올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장생포 방향의 동해 바다가 일부 보인다.
이 바위에는 ‘望夫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글은 1979년 울산에서 결성되었던 울산향토사 연구회에서 새긴 것이다. 예서체로 된 이 글은 석산 이길호씨가 썼다.
•망부천
망부석에서 북동쪽으로 70m 정도가면 있는 샘이다. 망부천이라는 명칭은 1987년 박제상 유적을 찾기 위해 치술령 탐사를 벌였던 한국교원대학 학술조사팀이 붙였다. 만화리 주민들에 따르면 치술령에 오르면 물이 이 샘 밖에 없어 이 샘의 물을 마신곤 했다고 말한다.
샘 주위는 자연석으로 쌓아져 있으면 샘물이 빠지는 수로에는 큼직한 돌이 놓여 있어 사람들이 이용한 흔적이 있다. 밑 바닥은 암반과 진흙으로 되어 있는데 샘의 규모는 직경이 70~115cm, 깊이가 80cm, 수심이 15cm이다.
•신모사당
박제상의 부인 김씨를 모셨던 사당이다. 이 사당은 치술령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한국교원대학교 학술조사팀은 지난 1987년 답사할 때 치술령 정상에 신모사가 있었던 터를 발견했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며 당시 사당의 울타리였던 토루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의 규모는 택지를 볼 때 10m×11m 정도로 추정했고 조사단은 이곳에 신라 토기와 기와편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울주군은 1999년 7월 이 장소에 신모사지 기념비를 세웠다.
치산사 보존회에서 세운 비문은 아래와 같다.
《천년의 빛난 충절․정절․효절이 창해와 하늘에 연하고 치술령 정상에 사당이 있었던 신모사지는 정렬 국대부인 김교 김씨의 영혼이 잠든 고댁이다. 삼강제일이요 만고의 무쌍이라, 부군은 충렬공 대아찬 박제상이며 왕손으로 사직의 중심이었다. 우리 강토 수 천 년 새 정기와 정신을 내리셨고 신라 파사왕 5세손으로 경륜과 뜻을 세워 요순의 덕을 본받아 나라를 도왔으며 구국을 위한 일편단심은 만세의 위엄을 안고 왜국에 들어가서 질류 중의 왕제를 구출하고 왜주에게 구속되어 순절했다.
부인은 부군의 도왜(渡倭) 소식을 접하고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망망한 동해를 바라보며 통곡하다 기진해 세 모녀는 열부와 효녀로 순절했다. 죽은 부인의 몸은 화하여 망부석이 되었고 혼령은 화하여 치술조가 되어 남쪽 비조산 은을암 굴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이에 부인을 치술신모로 세 모녀를 호국 3여신으로 칭하고 이곳에 신모사를 건립하였다.(삼국유사)
공의 공로를 기록하여 대아찬 추정 동명후에 봉하고 충절의 시호를 내리셨고 부인을 정렬 국대부인, 딸은 효녀로 추정하고, 생존한 2녀 아영은 왕제 미사흔에게 출가시켜 변한국부인에 봉하였다(동국열전)
공의 충절 부인의 정절, 두 딸의 효절, 한 딸의 효행과 그 아들의 의절로 일실사절이 한 가문에 현저함은 만고에 둘도 없는 위엄으로 후세에 귀감이 되어 치산사 보존회는 울주군수의 도움을 받아 삼국사기․삼국유사․삼강행실도․동경잡기․후손의 문집 등을 고람하여 이 사적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은을암
울주군 범서읍 척과리에 있는데 『울산읍지』에는 ‘은을암이 망부석 동쪽 10리에 있으며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서 암혈에 들어갔는데 지금도 암혈이 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은을암은 국수봉 동북쪽 바로 아래에 있으며 치술령 정상이 북쪽으로 멀리보이고 망부석도 가물거린다. 이 절은 해발 372m 높이에 있고 치술령 정상과도 10리 거리에 있있다.
이 절은 누가 언제 세웠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 절이 인근에 있는 공부암과 함께 19대 눌지왕 때 세워진 함듬사의 말사였다는 얘기가 있지만 신라에 불교가 23대 법흥왕 때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이 주장을 믿기가 어렵다.
김씨 부인이 새가 되어 들어갔다는 암혈은 은을암 북쪽 끝에 있는데 넓이가 1.25m, 높이가 1.8m, 깊이가 8m의 동굴로 되어 있다.
이 사찰은 이처럼 박제상과 관련된 전설을 갖고 있지만 절 자체가 전통 사찰로 등록도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사역의 건물 역시 옛 모습이 아니어서 이 사찰에서 박제상의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더욱이 혈암 앞에 세워진 「용왕각」은 혈암을 막을 뿐 아니라 사찰의 건축 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다.
•박제상 발선처 비
북구 강동면 정자리 유포석보 바로 옆에 서 있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1987년 박제상 발선처에 대한 연구와 답사를 끝낸 한국교원대학교 연구팀이 박제상이 정자에서 일본으로 떠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곳에 세웠다.
자연석 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에는 ‘朴提上使倭時發船處’라는 명문을 넣어 두었다.
비석이 있는 곳에서 보면 동해 바다가 시원스럽게 보이고 정자 포구도 정겹게 느껴진다.
이 비석 남쪽으로는 유포 석보가 산 능선으로 뻗어 있는데 답사팀이 이곳을 박제상의 발선처로 정한 요인 중의 하나가 이 유포석보 때문이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박제상이 떠난 율포에는 석보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석보가 있는 곳이 강동에서는 이곳 밖에 없기 때문에 이곳을 박제상의 발선처로 본 것이다.
2)경주
• 망부석
답사팀이 제2 망부석으로 부른 이곳은 치술령 정상 동편 약 50m 지점에 있다. 번지 상으로는 경주시 석계리 녹동 산 161이다.
치술령 정상에 오르면 쉽게 도달 할 수 있다. 석계에서 치술령으로 올라가면 이 바위가 먼저 보인다. 석계에서 치술령으로 올라가면 급경사가 되어 만화리에서 올라가기 보다는 힘들지만 등산객들 중에는 이곳으로 오르는 것이 더 운동이 된다면서 이 길을 택하기도 한다.
바위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높이가 10여m 정도가 된다. 바위 정상은 9m×3.5m의 넓이가 되어 평평함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동해를 보면 동해가 아주 잘 보인다.
•망부천
녹동에 있는 망부석에서 외동읍 녹동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150여m 지점에 있다. 주위가 바위로 되어 있고 경사진 곳에 샘이 있다. 그러나 조사단이 울산편의 망부천으로 불렀던 샘에 비해서는 수량이 훨씬 많고 수질도 산 아래로 흐르는 속도가 빨라 맑은 편이다.
석계에서 치술령으로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에서 가까운 이곳의 물을 약수라면서 많이 마신다.
샘의 형태로 보면 샘 주위가 모두 두터운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벌지지
경주시 배반들 망덕사지 바로 인근에 있다. 역사서를 보면 박제상은 고구려에 가 왕제 복호를 데리고 온 후 왕명에 따라 집으로 오지 않고 다시 곧 일본으로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소식을 늦게 들은 그의 부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뒤따랐으나 남편을 따르지 못하고 망덕사 남쪽 모래밭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고 되어 있다.
이곳이 벌지지로 불리는 것은 ‘뻗치다’의 고유음 곧 다리를 뻗친다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울산에서 경주로 가다 보면 사천왕사지가 있고 사천왕사지 앞에서 남산에 있는 화랑연수원쪽으로 가면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둑길을 200여m 정도가면 도착할 수 있다.
비석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여져 있다.
新羅 忠臣 朴提上 公 婦人遺蹟
처음 제상이 떠날 때 그 부인이 듣고 쫓아 가다가 미치지 못하고 망덕사 문 남쪽 모래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길이 부르짖음으로 그 모래를 長沙 라 하였다. 그 친척 두 사람이 그를 부액하여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다시 일어나지 아니 하였음으로 그 땅을 벌지지라 하였다. 三國遺事》
옆면에는 이 비석을 석굴암 연구회원이 1989년 10월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3)양산
•효충사와 효충사비
효충사는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충효부락에 있다. 이 건물은 정원수에 싸여 있는데 해방 후 건립되어 그 동안 퇴락된 것을 고 안종석씨의 주선으로 다시 벽돌로 건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맞배지붕 형태로 동향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에 큰 문이 있고 좌우에 작은 문이 마련되었으며 사당 내에는 충렬공 박제상의 진영과 위패가 동향으로 모셔져있고 그 옆에는 문량공 백결선생의 진영이 남향으로 놓여져 있다.
효충사 비는 사당의 앞 마당에 건립되어 있는데 장방형의 비좌위에 비신을 세워 놓았다.
비신의 크기는 길이 153cm, 폭 62cm, 두께 29.5cm이고 글자 지름 3~3.5cm이다. 표제는 ‘忠孝祠之碑’라 되어 있다.
이곳에 효충사를 세우고 석비를 건립한 것은 이 지역을 박제상의 생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충렬비
양산시 교리 춘추공원에 있다. 앞에는 ‘朴提上萬古忠烈碑’라 써여져 있다. 박제상 비석이 있는 곳에는 옆으로 3개의 다른 비석이 있다.
박제상 충렬비는 당초 양산 읍내에 있었던 관아에 세워져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지역 주민들이 왜경의 눈을 피해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해방 후 다시 파내어 1949년 현재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은 장방형 대석위에 낮고 넓적한 1단의 비좌를 마련했으며 비신위에는 전 후면에 화문을 조각한 개석을 올려놓았다.
개석의 조각이 선명한데 비해 대석의 괴임이 희미한 것은 당초 비석이 없어지고 대신 새로운 비석을 옛 대석위에 세웠기 때문인 것 같다.
비제는 전면에서 후면에 이르기까지 상하 2열로 ‘新羅贈大阿湌朴公諱提上 萬古忠烈碑’라 되어 있다. 끝에는 ‘崇禎紀元後四乙巳四月日 通訓大夫行梁山郡守西原韓兢人謹識’ 이라 되어 있어 이 글이 조선 24대 현종 11년(1845) 4월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고 글은 당시 군수 한긍인이 쓴 것임을 알려준다.
4) 대마도
•순국 기념비
대마도 북쪽 사고(佐護)라는 해안 마을에 있다. 이 비석은 한국교원대학교 황수영과 정영호가 박제상의 일본 순국을 기리기 위해 1988년 8월 8일 일본 인사인 나가토메히사에(永留久惠)와 함께 세웠다.
정면에는 ‘新羅國使 朴提上∙毛麻利叱智 殉國之碑’ 라고 새겨져 있다.
4. 박제상 사적보고서
한국교원대학교는 울주군이 1987년 3월 26일 박제상 유적지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 결과 4회에 걸쳐 시작했다.
조사단 구성원은 지도위원에 황수영 전 동국대학교 총장, 책임위원 정영호 한국교원대학교수, 조사위원으로는 정태범, 정인영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우병익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이다.
조사 일정을 보면 제1차 조사는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계속되었고 제2차 조사는 5월 2일부터 3일까지 이틀간 했다.
또 제3차 조사는 5월30일부터 31일까지 이틀간 마지막 제4차 조사는 7월1일부터 2일까지 이틀간 했다.
조사동안 참가한 인사들을 보면 황수영․ 정영호 박사 외에도 현지인 들 중 정을출 울주군 문화공보실장, 임인준 두동면장등이 있고 경주 출신의 김원주 향토사연구가도 이 팀에 여러 번 합류했다. 이외에도 답사에는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학생들이 많이 참가했고 당시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교수였던 장충식 박사도 여러 번 동행했다.
이 조사에는 지역 언론도 관심을 보여 울산 MBC가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에 동행했고 조사 내용이 전국에 방영되기도 했다.
조사단은 당시 조사를 시작하게 된 경위에 대해 “신라 충신으로 일컬어지는 박제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문헌이 오늘에 전하고 있는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행적이 훌륭해 그가 생존했던 당시와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그 행적이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조사단은 또 “박제상의 일대기를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 전하고 있는 박제상에 관한 글이 음미되어야 하겠다면서 특히 유적을 중심삼아 그 사적을 확인하는 동시에 해외에 있는 그의 사적 또한 우리 손으로 검토되어 내용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펴고 있다.
아울러 조사단은 “이번조사의 성과가 박제상의 생애에 대한 구명일 뿐 아니라 당시의 어려운 한일관계에서 그의 희생이 따랐던 충렬의 참뜻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옛 역사와 그와 직접 관련된 민족사 위인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그에 대한 기존자료의 재평가 또는 나아가 재 발굴의 계기를 얻고자 한다”고 해명하고 있다.
교원대학에서 박제상 유적지에 대한 조사를 할 때 목적은 치산서원을 복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탐사도 치산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치산서원지는 만화리 어귀에 있었으나 대부분의 터가 보리밭이었고 밭 사이로 높이 1m~1.5m 석축지만 100m 정도 있었다.
이중 서원지는 석축 위쪽의 경작지로 이곳에서 많은 기와 편과 자기편이 발굴되었다. 충렬묘지와 신모사지는 이 보다 안쪽에 있는 낮은 산봉우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91년 울주군은 당시 탐사를 기준으로 해 치산서원을 복원했다.
망부석에 대해서는 조사단은 어정쩡한 결론을 내렸다. 한국교원대학교 연구팀은 ‘김씨 부인이 당초에는 울산쪽에 있는 바위에서 동해를 바라보다가 나중에는 좀더 동해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경주 쪽에 있는 바위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 양측의 손을 모두 들어주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조사단은 두 개의 망부석을 두고 탐사 한 결과 울주군 만화리 쪽에 있는 바위에서는 신라 시대 와편이 일부 발견되었는데 반해 경주 녹동 쪽에 있는 바위에서는 와편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요즘 들어 경주와 가장 논란을 일으키는 망부석의 진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박제상의 발선처에 대해서도 조사단이 정자쪽을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향토사학자들 사이에는 울산에서 가까운 정자가 아닌 정자에서 경주 쪽으로 더 올라간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조사단은 1934년에 발간된 『울산읍지』를 비롯해 각종 옛 역사서를 인용 발선처에는 성이 있었다는 주장을 앞세워 현재 유포석보가 있는 강동지역이 박제상이 왜로 떠난 발선처로 비정하고 이곳에 발선처 비를 세워 놓았다.
양산에 대한 조사에도 나섰던 조사단은 박제상이 태어난 곳이 양산이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 하고있다.
은을암에 대한 답사도 한 조사단은 이에 대해서는 당시 이 사찰에서 발견된 기와편이 신라 시대의 것이 아닌 조선시대의 것이 되어 이 사찰이 신라시대 세워졌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시대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내어 놓고 있다.
조사단은 먼저 춘추공원에 있는 ‘박제상만고 충렬비’를 인용 이곳에 쓰인 글의 내용을 볼 때 양산의 효충동을 박제상의 탄생지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사단은 또 양산에서 효충사와 효충사비를 효충 부락에 세운 것 역시 박제상이 양산 사람이라고 확신을 하기 때문에 세운 것이라고 말해 박제상이 양산 출신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끝으로 조사단은 유적 답사를 한 결과 기록에 보이는 유적은 모두 귀중하며 이 유적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존책이 세워져야 하고 또 그래야만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선 망부석에 대해서도 앞으로 이곳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망부석이 훼손되지 않도록 주위 경관에 대한정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은을암에 대해서도 이 사찰이 역사의 현장으로 전혀 냄새를 풍기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사찰을 증개축할 때 박제상 유적지와 관련된 얘기들이 반영될 수 있도록 건축물을 세워 은을암 자체가 사적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세부계획으로 양산시가 충효사의 건물을 한옥으로 개축하고 징심헌지도 사적으로 지적토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벌지지가 박제상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인 장소를 알리는 석비를 세워야 하고 박제상이 떠난 곳으로 추정되는 정자에도 석비를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로 말하면 이곳에는 현재 모두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상태다.
5. 망부석 진위에 대한 논란
박제상 유적지에 대해서는 망부천, 발선처 그리고 그의 출신이 어디인지 심지어는 그가 일본 어디서 죽었는지 등을 놓고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그러나 조사단이 탐사 후 발표한 유적지중 가장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 망부석의 진위다.
특히 조사단이 울산과 경주에 있는 두 개의 바위에 대해 둘 다 망부석이라는 발표를 한 후 경주 쪽에서 심한 반발을 하고 있다.
경주 시민들 대부분은 한마디로 당시 조사가 울주군이 예산을 지원하고 또 울산지역 인사들이 조사단에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결과가 울산에 유리하게 나왔다면서 이에 대한 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망부석 문제와 관련 조사단의 결정에 대해 경주 사람 중 가장 반대를 하고 나서는 사람이 평생을 망부석 아래 경주 석계에서 살았다는 김대원씨다. 그는 한국교원대학에서 내어놓은 박제상 사적조사보고서를 본 후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었다면서 1999년 이 조사보고서를 반박하는 『서라벌의 망부석 아직도 울음 운다 』라는 책자를 내어 놓기도 했다.
조사단의 보고서 내용에 대해 크게 반발하는 경주 사람이 또 한명 있다. 그 분은 오랫동안 경주박물관 회장을 지내다가 얼마 전 고인이 되었던 김원주씨다. 당시 그는 경주 향토사연구가로 경주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이 답사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우선 김대원씨는 그의 책에서 망부석은 첫째로 동해는 물론이고 박제상이 일본으로 떠났다는 율포가 잘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하고 두 번째로 일본을 응징해 위엄을 갖추고 있는 쪽의 바위어야 하고 세 번째로 누가 보아도 머리가 숙여질 수 있는 웅장함이 있어야 하며 네 번 째로 박제상가의 충․효․의․열 4절의 정기가 서려 있어야 하며 다섯째로 극일의 정서에 역행하는 일본인의 손때가 묻은 자료를 근거로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이 책을 발간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이런 논리로 볼 때 경주 쪽 녹동 산 161번지에 있는 망부석을 배제하고 울산쪽 만화리 소재 ‘세효녀아기바위’를 망부석이라고 주장하는 울산시의 처사에 대해 양식 있는 시민으로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여러 번 울산시에서 현재 망부석이라고 주장하는 바위는 망부석이 아니고 ‘세효녀아기 바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녹동 쪽 바위가 진짜 망부석일 수밖에 없는데도 울산시가 이렇게 만화리 쪽에 있는 바위를 망부석으로 지정한 것은 경주시가 박제상의 업적을 잘 모르고 과소평가해 이 바위를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관문성을 경주시 지방문화재 제 48호로 지정한 경주시가 왜 이 바위를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경주시를 나무라고 있다.
이에 반해 울산시는 만화리 쪽에 있는 치산서원을 증축함과 동시에 경남 지방문화재 제90호 내의 부속물로 지정했다가 다시 울산이 광역시가 되자 이 바위를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 전국적으로 홍보함과 동시에 치술령 정상에다 국대부인 신모사지의 대형 비문까지 세워놓았기 때문에 우선 홍보 면에서 경주시가 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경주시의 이런 무관심에서 빚어진 사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경주 외동 녹동 주민의 정서는 돌아보지 않고 울산시 만화리의 주민 정서와 치산서원의 정보만을 믿고 이쪽으로 등정해 망부석이 아닌 망부석을 보고 진짜 망부석이라고 착각하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또 우리들이 때때로 사실 확인 없이 남이 말하는 자료나 기록만을 갖고 그것을 그대로 믿고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우를 범하는데 그 한 예가 망부석이라고 말한다.
그는 울산시의 경우 망부석을 1934년 일제 때 발간된 『울산읍지』의 맨 끝에 있는 ‘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이 읍지의 문장을 해석하면 「지금 망부석 좌우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두 계집의 몸이 화하여 된 것이라고 전하고, 또 한설은 부인을 지탱 시킨 베틀 바위라 한다」라는 내용인데 이 내용을 읽은 후 도저히 자신은 납득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우선 『울산읍지』라는 책이 일제 강점기 만들어져 그 내용의 신빙성이 없고 또 그 내용에 따르더라도 만화리 바위는 3개의 바위가 한 개의 바위로 뭉쳐 만들어져 책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화리 쪽 바위를 망부석으로 정한 조사단은 치술령에 올라가 일일이 답사 확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특히 녹동 쪽에서 오르면 있는 바위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치산서원쪽에서 오르다가 이 바위를 보고 망부석으로 정하는 우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 글에서도 다시 만화리쪽 바위는 세 딸이 치술령에서 어머니와 함께 유배되어 살았다는 ‘세효녀 아기 바위’일 뿐 절대로 박제상 부인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동해를 내다보았던 바위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석계 녹동리 쪽에 있는 바위가 망부석인 요인으로 석계 초등학교 교가 까지 인용하고 있다.
석계 초등학교의 교가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다.
‘크나큰 충절이여 천추의 교훈/ 남기신 박제상의 영원한 생명/ 망부석 전해 오는 거룩한 정열/우리의 배움이요 행실이로다/ 지성껏 배우자 부지런히 일하자/대한의 새일꾼 낸 줄을 아느냐/ 길이길이 빛내자 석계초등학교.
김대원씨는 또 만화리 쪽에 있는 바위에 ‘ 望夫石 ’이라고 새겨 놓은 글에 대해서도 “처음 이 글을 보았을 때 놀라움이 컸지만 나중에 울산시의 충정을 이해하게 되었다면서 경주시는 말로만 충효를 외치면서 신라 문화제가 열릴 때 마다 치술 신모를 추모하는데 반해 그 신모의 상징인 망부석을 기념물로 지정하지 않는 우를 범해 결국 경주의 중요한 문화재가 이처럼 진위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경주시의 잘못된 문화정책을 나무랐다.
특이한 것은 울산사람들이 망부석을 일명 베틀처럼 생겼다고 해 베틀 바위라고 부르는데 반해 저자는 베틀 바위가 치술령에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결론에서 「세효녀 아기바위」와 「베틀바위」, 「망부석」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 놓고 있다.
•세효녀 아기바위
박제상의 세 딸이 치술령에서 어머니와 함께 머물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는 세 효녀의 전설과 아기∙아경의 두 처녀 시신을 묻었다는 곳으로 이 바위는 치술령 정상에서 약 300m 남서쪽 능선을 타고 만화리 쪽으로 내려가면 바위가 세 개 있는데 제일 높은 동쪽 바위가 4m 20cm 이라고 해 결국 울산에서 주장하는 망부석을 세 효녀 아기바위라고 풀이해 놓고 있다.
•베틀바위
국대부인이 죄 없이 치술령에 유배되어 남편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기 위해 베틀을 차려 놓고 딸들과 교대로 베를 짰다고 하는 바위다. 치술령 정상에서 북쪽 능선 약 100m 아래에 있는 세 개의 바위로 가장 높은 맨 아래 바위높이가 약 7m 이고 중간바위가 5m이며 위쪽 낮은 바위가 약 2.5m이다. 특히 중간 바위는 흡사 베를 감은 것 같은 12층계가 있어 특이하다.
•망부석
박제상 부인이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동해를 바라보고 천지신명께 기도드린 기도처이고, 치술령 산신에게서 ‘흰 구름이 솟구치면 남편이 살아오고 붉은 구름이 솟구치면 남편이 죽어 온다.’는 계시를 받은 곳이다.
어느 날 동해를 바라보다 붉은 구름이 솟구치니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 죽어 혼이 되어 남편이 있는 그곳으로 날아가 남편을 만나서 계림국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동해 건너 일본을 바라본다 해 망부석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이 바위는 시시때때로 남편을 그리며 울고 있어 그 바위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치술령 정상 남동쪽 9.9부 능선, 해발 765m 정상에서 약 10m 아래 녹동 쪽에 있는데 이 바위는 높이가 18m 이상이며 윗면 가로의 길이가 11m 이상이다)
이와 같이 「세효녀 아기바위」와 「베틀 바위」, 「망부석」은 각각 따로 있다.
당시 경주 사람으로 유일하게 조사단 일원으로 참여했던 김원주씨 역시 당시 조사단이 비정한 망부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답사를 마친 후 경주 인근에는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모시는 선도산, 남해왕 부인을 모시는 운제산, 그리고 박제상 부인을 모시는 치술령 등 신모사가 있는 곳이 3곳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신모사는 대체로 산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인근에는 반드시 기우제를 지내던 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풍습은 옛 사람들이 이들 산을 신성시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이렇게 볼 때 치술령의 경우 신모사가 있었던 곳이 경주 쪽에 있는 바위 인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요즘 들어 울산과 경주에서 어느 바위가 진짜 망부석인가를 놓고 신경전을 펴는 모양인데 요즘은 행정구역이 다르다 보니 이런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신라시대만 해도 치술령이 있었던 울산지역이 경주에 속하다 보니 이런 논쟁은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원주씨 역시 이와 관련 진짜 망부석을 가리라고하면 그는 경주 녹동리쪽에 있는 바위가 진짜 망부석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1987년 교원대학 조사단과 함께 탐사를 해 보니 현재 울산에서 망부석이라고 주장하는 만화리 바위에서는 와편이 전혀 나오지 않았는데 반해 녹동 쪽 바위에서는 토기와 기와편이 적잖게 발굴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87년 발굴 당시 녹동리 쪽 바위에서는 토기와 기와는 물론이고 옛 사람들이 사용했던 상평통보까지 나왔는데 이것은 아마 사당이 세워진 후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제단위에 올려놓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또 울산사람들이 주장하는 만화리 바위가 베틀처럼 생겼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설을 보면 성모가 나오는 지명에 베틀과 관련된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베틀은 성모가 머물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지 베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 말했다.
특히 그는 당시 조사단이 내어 놓은 보고서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관점에서 수정되어야 할 곳이 많다고 말한다.
“당시 학술조사단이 울산쪽에 있는 바위가 마치 진짜 망부석 처럼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은 학술 조사가 울산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면서 “그 때 학술조사단에 합류했던 울산 사람들 중 만화리에 있는 바위를 망부석으로 지정해 달라는 사람들이 많아 조사단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것 같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학술조사단장을 맡았던 정영호씨에게 지형적인 위치만 보더라도 경주 녹동쪽에 있는 바위가 망부석이 정확하다면서 항의를 엄청나게 했는데 어떻게 보고서가 이렇게 나왔는지 알 수 없다고 살아 있을 때 말했다.
6. 맺는말
울산이 충효의 도시라는 근원이 되는 박제상 유적은 최근 들어 경주 지역 사람들이 관심을 쏟으면서 이처럼 진위 문제가 말썽이 되고 있다.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박제상 유적의 진위는 그의 행적이 이미 1천500여 년 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밝히는 것이 쉽지 않다.
더욱이 그의 행적과 유적에 대해 남아 있는 역사서와 책자들조차도 진의를 찾아내기에는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게 되어 있다.
1987년 한국교원대학 답사팀이 박제상 유적을 발굴하면서 강조한 것처럼 당시만 해도 유적에 대한 발굴은 박제상의 행적을 더듬어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박제상 가족들의 충과 절과 효가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지방화 시대가 되면서 각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고장에 있는 유적지를 대외적으로 알리고 상품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박제상 유적지 역시 이런 면에서 본다면 경주 쪽에서 이의를 제기 한다면 명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이 요구된다.
망부석에 대해 울산시와 경주의 이런 논쟁을 알고 치술령에 올라갔다 온 사람들은 대부분 망부석의 위치에 대해 지정학적으로는 동해가 훤히 보이는 녹동쪽이 진짜지만 치산서원과 비조 마을 등이 두동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정서상 만화리에 있는 바위도 망부석이 아니라고 보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1987년 조사단의 문제점이 있다면 조사단이 일방적으로 울산 사람들 위주로 짜여져 있었고 또 예산을 울주군에서 지원했다는 것이다.
조사기간 역시 1987년 4월 17일부터 7월 2일까지 4회에 걸쳐 했다고 하지만 정작 조사를 한 날은 9일에 불과해 유적지의 귀중함에 비해 조사기간이 짧다.
보고서 내용 역시 예산상의 문제점이 있었겠지만 너무 허술한 편이다.
1987년 조사 후 박제상의 유적지에 대한 진위를 밝히기 위해 개인적으로 연구나 답사를 한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볼 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울산시와 경주시가 합동으로 다시 한번 조사단을 만들어 본격적인 답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제2부 단편소설
잃어버린 서라벌의 혼, 망부석
10월 3일 아침 일찍 H신문사 사회부 N기자가 문화부 기자 Y양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 망부석(望夫石)을 탐방 취재하려고 우리집에 왔다.
그들이 도착하자 마자 나는 등산 배낭을 챙겨 지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때부터 입에 거품을 물고 침이 마르도록 가파른 비탈 험준한 벼랑길을 오르면서 E교수님이 내게 가르쳐 준 그대로 망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2시간 30분만에 치술령 정상까지 올랐다.
그런데 이 왠 일인가! 정상에 오르자마자 나는 나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접하고 말았다.
얼마 전에 올라왔을 때만 해도 없었던 새로운 안내판이 어서 읽어보라는 듯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안내판에는 망부석이 경남지방문화재 제90호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이었다.(지금은 울산광역시 지방유형문화재기념물 제1호다) 게다가 다른 한쪽
에는 전에 세워둔 망부석 안내판은 보이지 않고 나무막대에다 흰 칠을 먹인 후 망부석이라는 검은 글자를 써서 화살표까지 만들어 세워둔 표지판이 있었다. 그런데 그 표지판이 망부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망부석이 없는 남서쪽 다른 오솔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의심하면서 주변을 다시 세심하게 살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영봉 전체를 경상남도 지역으로 착각할 만큼 꾸며 놓았다. 심지어 경남 울주군에서 치술령을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자연보호를 해 달라는 당부 말씀까지 표지판에 써 놓았다. 정말 상상이 불가한
터무니없는 내용을 정말처럼 담은 표지판이었다.
나는 그 표지판을 좌우로 흔들어 뽑아 버리려고 힘주어 애를 썼으나 헛일이었다. 견고하게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자신이 무너지는 듯한 경련을 일으키며 화를 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우리집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Y기자와 N기자에게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한 나의 망부석에 대한 모든 지식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건 말이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내 친구가 울산시청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어찌 이것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무시한 걸까? 아니면 눈을 감아 준 것일까? 무엇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나는 그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망부석은 시래마을 내집에선 방문만 열면 마주 보이는 바위다. 날만 새면 양팔을 벌리고 나를 안을 듯 어서 오라 부르는 어머니 품 속같은 치술령 정상에 위치해 있는 바위다. 365일 민족의 혼 충효의열 4절(忠孝義烈四節)을 가르쳐주면서 어서 자라나라고 격려하던 내 어린 시절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었던 '큰 바위 얼굴'이다. 그런데 그 바위가 충효의열 4절의 전설이 담긴 망부석이 아닌 가짜였단말가! 너무나 기가 막혔다. 그때 내 머리에 스쳐 지나간 것이 E교수님의 말씀이었다.
{누군가가 이 망부석을 부인한다면, 먼저 이곳에 올라오도록 하십시오. 치술령 정상에서도 보기 어려운 박제상이 화형당한 목도가 다만 여기 이 바위 위에서는 날씨만 청명하면 확실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과, 박제상부인의 유골을 이 바위 위에 묻었다가 다시 옮긴 사실과, 365일 바위가 눈물을 흘리는 흔적이 있다는 그 사실과, 박제상 부인이 이 바위 밑 작은 굴에 들어가 몽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됩니다.}
나는 E교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입을 다문 채 표지판의 화살표 방향이 진짜 망부석이 있는 동남 방향으로 돌려 놓은 후 묵묵히 그들을 망부석이 있는 오솔길로 인도했다.
뒤따라 오던 두 기자는 실제 망부석에 당도하여서는 망부석에 올라와 보지도 않고 모두들 실망하는 눈치다. 그리고는 안내판의 그 화살표 쪽으로 가 보자는 것이다. 나는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자 우선 올라와 본 후 말씀하십시오. 지금 높은 영봉에서 내려다 보니 이 바위가 별 볼품없지요. 여기 올라와 봐요?"
내 강권에 못 이긴 채 하고 그들은 나를 따라 올라왔다.
"어마마!"
그들은 아찔한 듯 깜짝 놀랐다.
정작 올라와 보니까 오르기 전 상황과는 너무나 달랐던 모양이다.
"와! 정말이네요. 이 높이가 얼마나 되어요?"
윗면이 비교적 넓었지만 오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몸이 흠칫함을 보았다.
"18m입니다. 오늘 줄자를 가지고 왔으니 다시 한 번 재어 봅시다. 그리고 여길 좀 봐요."
나는 그들에게 보란 듯이 함몰 부분을 손으로 만지면서 설명했다.
"여기 꼭 시체 한 구를 묻을 만하게 패어 있지요? 이곳서 떨어져 죽은 박제상 부인의 시신을 처음에는 지금의 경주 낭산 아래 망덕사 부근에 묻었다가 후일 그의 아들 문량이 어머니의 원혼(怨魂)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다 이장을 했답니다. 이상하게도 부인이 죽은 이후 몇 년간 건(乾)장마가 들어 이슬비만 간간 뿌리며 365일 하늘의 해가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박제상 부인의 한이 하늘에 맺혀 있어 이를 풀어 주어야 한다 하여 그녀의 묘를 망부석 바위 위에 모시기를 주장했습니다. 그때 또한 문량에게는 밤마다 어머니가 망부석 위에 올라가 남편을 부르며 슬피슬피 울고 있는 꿈을 꾸게 되자 더이상 견디지 못하여 매형인 미해에게 알리고 미해는 눌지왕에게 이야기하여 망덕사 부근에 있던 유해를 이곳으로 옮겨 모셨답니다. 그래서 이 바위를 망부석이라 불렀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반대 현상의 기상이변이 일어났답니다. 칠년대한(七年大旱)이라는 말이 이때 유래되었다고도 합니다만 신기하게도 사방 700리에 한발이 계속되어 오곡백과가 모두 시들고 타들어 죽어 갔답니다. 유명하다는 풍수를 불러 그 연유를 물어보니 이 산꼭대기에는 누구든 묘를 쓸 수 없다고 해요. 만약 묘를 쓰면 사방 700리에 가뭄이 7년간 계속된다고 해요. 그러나 쓴 무덤이 칠 년 동안만 파헤쳐지지 아니 하고 견디기만 하면 이 영봉에다 묻힌 유골은 7
년만에 용이 되어 등천(登天)하게 되고 무덤을 쓴 후손은 자자손손 황족이 되어 부귀공명을 누리며 번창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아s는 자들은 남 몰래 한밤중에 이 높은 산까지 시신을 업고 와서 암매장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파헤쳐지고 말았답니다.
박제상의 아들 문량도 어머님의 유골을 이곳에 묻은 후 7년을 견디지 못하고 눌지왕이 죽고 새로운 왕 자비가 용상에 오르자 충효의열 4절의 정신은 물론 청렴결백한 효심으로 빚어진 어머니의 분묘 이장이 용상을 노린다는 모함으로 둔갑하여 벼슬에서 추방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 상심은 형용할 수 없이 심하였다 합니다.
문량이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대자연 속에 묻혀 살며 백결(百結)선생이라 불려지게 한 것도 왕족들의 이러한 행패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충정이 무시되고 부당하게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미해를 구출해 오지 못하였다면 전 가족이 일평생 치술령 산정에서 살아야만 했던 것을 생각하니 오금이 조여들고 눈앞이 아찔하여 치가 떨렸던 것입니다.
그때 치술령 산정에 유배를 당한 탓으로 결국은 어머니와 누나들이 모두 치술령 높고 험한 외로운 산 속에서 일생을 마치게 되었고, 특히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억울하였으며 뼛속 깊은 원한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을까. 그러기에 대궐에서 열녀상을 내리고 국대부인의 칭호를 하사(下賜)한다 해도 궐(闕) 안으로 들어가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드디어는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자살까지 하셨을까, 하는 연민의 정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슴에 사무치어 그 아픔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누나 아영에게 대궐에 머물고 있는 것을 비관하며 수치 서럽다고 말하고 있는 터에 새로 왕위에 오른 자비왕이 풍수의 말을 믿고 '문량이 그 어머니의 유골을 망부석으로 이장한 것은 용상을 노리고서 한 행위다'
하는 모함을 씌워 대궐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치술령 망부석 위에다 유골을 모신 후 7년을 넘기지 못한 탓이라고 전합니다
"이상하지요. 왜 이 산정에 무덤을 쓰면 비가 안 오지요"
"전하는 말에 의하면 유골이 용으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사방 7백 리의 땅과 하늘의 운기(運氣)와 모든 정기(精氣)를 빨아먹고 생령(生靈)들의 생기(生氣)를 모두 마셔야만 성화(聖和)할 수 있답니다. 아버지의 충정과 어머니의 절개와 두 누나들의 효심에 의한 젊디젊은 죽음의 댓가가 이런 엄청난 모함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생각하니 더 이상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문량은 대궐 밖으로 추방당한 후 세상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믿고 가족들을 이끌고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 들어가 풀뿌리를 캐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어쩌다 가끔 사냥꾼이나 나무꾼들의 눈에 띄어 백결선생이란 별명이 붙여진 것인데,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한 벌의 옷을 죽을 때까지 갈아입지 않고 살았으므로 그 옷이 낡을 데로 낡아 천 조각 만 조각 기워 입었다고 지어진 이름이라 해요. 그리고 백결은 궐안에 있을 때 가야국에서 전래된 악기 가야금을 즐겨 탔는데 산 속에서도 그 가야금을 계속 타고 즐겼으므로 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 애절한 가야금 소리를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가서는 온종일 백결과 담화를 하다 날이 저물어 그곳에서 투숙하고 다음날 내려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가 듣는 가야금 방아타령 등이 그분으로부터 유래 된 민요라고 해요.
그는 궐밖으로 추방되기 전에 망부석 위의 분묘를 다시 거두어 지금의 경남 울산시 두동면 만화리 치산서원이 있는 그곳에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년 봄가을이면 문량은 온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 찾아와 종일 가야금을 타고는 어두움과 함께 어디론가 살아졌다
합니다. 그후부터 이 치산서원에서는 치술령 신모 국대부인을 모시는 춘추 대제(春秋大祭)를 거국적으로 행했다 합니다. 그러자 하늘이 비를 주어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고 해요. 그 후부터는 날이 가물면 주민들은 혹시 누군가가 치술령 정상에다 유골을 암매장 하지 않았나 하고 마을 유지와 장정들이 올라와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후 영봉 일대를 파헤쳐 시신과 유골을 찾았다고 해요. 그러다가 간혹 무덤을 발견하여 시신을 찾은 예도 몇 번인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유골을 들어내니 갑자기 소나기구름이 몰려와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고도 해요. 그래서 이 치술령을 무제봉〔舞雩祭峰〕이라고도 부르기도 했어요. 내가 어릴 때는 치술령 산신에게 무지개를 보이면 큰비가 온다 하여 '무지개봉'이라고도 불렀어요.
이런 전설을 담고 있는 이 바위가 망부석입니다. 틀림없습니다.혹자는 부인이 남편을 기다릴 때 목도에서 붉은 구름이 솟구치자 남편이 화형당한 것으로 알고 놀라 기절하여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고요. 그런 전설을 머금고 있는 바위가 이 바위인데 또 다른 망부석이 치술령 일대에 따로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리고 저기 우측 중앙을 좀 봐요? 촉촉히 물이 젖어 흐르고 있지요. 실지로 물이 말라도 이 바위에서는 항상 저런 미량의 물이 흐르는 것같이 보이고 사실 미량의 물이 시시때때로 째여 나오니 자고로 모든 사람들이 수수께끼라고 해요. 그래서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남편을 생이별 한후 이 산정에 유배되어 애타게 남편을 기다리며 흘린 박제상 부인의 한 맺힌 눈물이, 바위가 된 후에도 그치지 않고 흐른다고 해요.
남편을 생이별한 여인의 한 맺힌 눈물! 실지 삼사 년 가뭄이 지속된 금년 같은 가뭄에도 해발 765m 이 높은 영봉 밑에서 특히 18m 우뚝 치솟은 바위 중앙에서 물기가 저렇게 촉촉히 젖어 흐르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는 사실은 실로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지요?
또 저 남서쪽 저 건너 산을 보십시오. 조그마한 암자가 보이지요. 저 암자가 은을암(隱乙岩)이며 그 암자의 전설도 이 망부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여기서 떨어져 죽자 두 딸도 뒤따라 죽어 그 두 혼령이 두 마리의 새가 되어 남서쪽으로 날아가서 저기 보이는 저 암자 속으로 숨었다 해요. 저 아래의 골을 봐요. 얼마나 깊어요. 끝이 보이지 않지요."
"실지로 내려다 보니 간담이 서늘하네요. 전 겁이 나서 안되겠어요. 앉을레요. 여기 앉아서 이야기 들을께요."
여기자 Y양이 먼저 앉았다. N기자와 나도 같이 따라 앉았다.
"박제상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던데 어째서 둘만 떨어져 죽었어요?"
"그래요, 박제상에게는 딸 셋, 아들 하나가 있었죠. 그의 첫딸의 이름이 아기(阿奇)이고 둘쩨딸 이름이 아영(阿榮)이며 셋쩨딸 이름이 아경(阿慶)이고 막내가 아들로서 문량(文良)이지요. 박제상 부인은 남편이 미해(美海: 未斯欣))를 구해 오겠다 하고 왜국으로 갔는데, 미해는 구해 오지 않고 오히려 왜왕(倭王)에게 항복하고 왜의 신하가 되었다 하여 치술령 정상에 그 가솔들과 함께 유배가 되는 비극을 겪게 되지요. 그 산 위에서 남편이 돌아 올때까지 기다리며 살았어요. 그러다가 남편 박제상에 의해 미해가 돌아오자 그때서야 그녀와 가솔들은 치술령 유배지에서 풀려 났지요.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니 딸들도 어머니를 따라 하산을 하지 않았다 해요. 그러나 치술령 산신의 몽시를 받은 그녀는 남편이 혹시 돌아오지 못하면 아들만이라도 금성으로 보내야 한다고 판단하고 외아들 문량과 둘째딸 아영이를 설득시켜 유배지인 치술령 산정에서 먼저 하산하도록 하였지요. 그러나 끝까지 하산하지 아니 하자 어머니는 딸들이 모르게 기도하기 위해 움막집을 나와 이 바위 위로 혼자 왔다가 그만 동해 바다에서 피어 오르는 붉은 구름을 보고는 뛰어내렸지요. 그러고난 이후에 두 딸도 뛰어내렸으나 문량을 업고 있던 둘째딸 아영만은 어머니의 시신과 언니와 동생의 시신을 거둘 것을 염려하고 특히 어린 남동
생 문량을 키우기 위해 죽지 못하고 돌아서니 눈앞이 캄캄했다 해요. 훗날 아영은 아버지가 왜국에서 구해온 미해 왕자와 결혼을 하여 동생 문량을 대궐에서 키웠으며, 문량이 철이 들어서 이 사실을 알고는 한없이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해요."
"『삼국사기』나『삼국유사』의 내용과 실제 전설과는 차이가 많은 것 같은데요."
"우리 교수님의 말씀인즉『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서 밝히는 망부석 전설은 당시의 참혹상을 미화시키기 위해 박제상이 화형당한 후에 딸들과 아내가 금성에서 치술령에 올라가서 남편을 그리다가 부인은 망부석이 되고 딸들은 새가 되었다고 하였다 하셨어요. 실지는 그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하셨어요. 박제상이 일본으로 떠남과 동시에 그들 전 가족은 치술령 산정에 유배되었고 그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오나 망부석에 올라가서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다 그가 화형당하는 그날, 아내도 두 딸도 함께 바위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럼 박제상이 왜국에서 있었던 일은『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합니까?"
"『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있는 이야기가 서로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나는 E교수로부터 들은 그대로를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서기 390년경이었다. 왜왕이 계림국 내물왕에게 사신을 보내 전하기를
"우리 임금이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이유는 계림국과 형제국이 되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 조건으로써 계림국에서는 훌륭하고 유능한 신하 한 분을 왕자와 함께 우리 왕실에 보내어 양국의 국사(國事)를 함께 도모코자 하십니다. 듣건대 계림국 내물왕께서는 하늘(神)과 같
이 어지시며 거짓이 없고 정직한 분으로 믿고 있아 오매 그러한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코자 하십니다."
"정말 고마운 일이오. 우리 계림국도 귀국과 화친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반대할 리가 있겠소. 이웃 백제가 밤낮 국경을 넘어와 분쟁을 일으키고, 고구려 역시 계림국을 업신여기어 침략을 일삼고 있는 터니, 서로 화친하여 형제국이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경사가 없지요.
그렇게 하리다. 짐의 나라에 누구를 보내 오리니까?"
"화친의 징표로 어린 왕자 한 분과 신하 한 분을 모시고 오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임금에게 계림국의 성심을 나타내는 것이라 여기옵니다."
사신의 그러한 권청을 받고서 어쩔 수 없이 내외 중신들을 불러 모아 의논한 끝에 내물왕은 이제 갓 열 살된 그의 셋째아들 미해와 내신 박사람(朴裟覽)을 부사(副使)로 하여 왜국으로 보냈다. 그런데 그후 왜국은 30년간이나 미해를 잡아 놓고 계림으로 되돌려 보내지 아니하였다.
내물왕은 이 일로 마음의 병을 얻어 오랫동안 시름하다가 결국 아들과의 이산(離散)의 한을 안고는 눈을 감지 못하신 채 돌아가시니 대를 이은 계림국 눌지는 절치부심하면서 선대조의 한을 풀기로 결심하였다.
고구려 또한 계림국의 이런 저간의 정황을 이용하여 화친을 도모한 후 북진정책(北進政策)에 전념하기 위한 계책으로 계림국의 왕자를 불모로 보내도록하여 계림국으로 하여금 함부로 대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때는 419년이었다. 고구려국 사신은 눌지왕 앞에 무릎을 조아리고 엎드려 말했다.
"저희 나라 장수대왕께서는 폐하의 아우인 보해(寶海 혹은 卜好) 왕제(王弟)님이 지혜와 총명이 유별하고 재주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가깝게 지내면서 여러 가지 자문도 받고 의견도 나누고자 하오니 고구려국으로 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만 하신다면 고구려국과 계림국은 형제국으로 여타 나라의 침입을 함께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왜국에 가 있는 아우도 구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 사신의 이러한 간청을 듣자 눌지왕은 매우 기뻐하며 내신(內臣) 김무알을 보좌로 삼아 그의 아우 보해를 고구려국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코자 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도 왜국처럼 아우 보해를 억류하고 되돌려 보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치를 떨며 더는 참지 못하고 문무백관을 불렀다. 이때가 눌지왕 10년(426년) 왕은 큰 잔치를 베푼 후 억울한 사연과 국가적 위신이 말이 아님을 말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기를
"왜국과 고구려국이 우리 나라를 얕잡아 보고 왕손을 억류해 저희 나라 이익을 취하고자 하니 더 이상 견딘다는 것은 계림의 수치다. 짐이 아무리 좋은 수라상을 받는다 한들 두 아우를 이국 땅에 인질로 두고서 어찌 마음이 편하게 먹고 마시며 즐기리. 내 부왕의 한을 풀고 짐의 실수를 회복한 후 저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내 지금 죽어서라도 낯을 들고 부왕을 뵈올 수 있으련만…‥. 누가 짐의 이 원통함을 풀어 줄 것이고!"
하고 탄식하다가 또 입을 열어 말하기를
"만약에 짐의 두 아우를 구하여 고국으로 데리고 와서 짐이 두 아우와 함께 사당에 가서 부왕을 뵙게 해준다면 더 이상의 바람이 없겠건만…‥. 만약에 이같은 소원을 풀어주는 이가 있다면 짐이 큰 벼슬과 상을 내리리라."
하였다. 눌지왕의 이같은 탄식을 들은 신하들은 몇 날 며칠을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던 중 한 사람이 나와서 말했다.
"이 일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또 용기만 가지고 있다하여서 가능한 것만이 아닙니다. 이는 지혜와 용맹이 겸비한 장수가 아니면 어렵습니다."
"어디 그런 장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계림국에서…‥."
"저가 알기로는 그러한 사람이라면 삽라군(揷羅郡:지금의 양산군) 태수로 있는 박제상(朴堤上:혹은 金堤上)이 있습니다. 아마 박제상 같으면 이 일을 능히 해 내실 분으로 봅니다.
그는 의리가 있고 용맹스러우며 지혜 또한 남달라 능히 상감마마의 한을 풀어 들이는데 부족함이 없는 분으로 생각됩니다."
신하들은 이렇게 중지가 모아지자 즉시 눌지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눌지왕은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어 박제상을 불러오게 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부름에 달려와 배알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문무대신 모든 백관이 중지를 모아 말하기를 짐의 한을 귀공만이 풀어줄 수 있다는데 정녕 짐의 소원을 풀어줄 수 있겠소?"
하고 말하니
"신이 알고 있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그 신하는 죽음으로 그 욕을 대신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 비록 미천하오나 일신을 바쳐 상감마마의 한을 풀어 드리고자 하옵니다."
눌지왕은 옥좌에서 일어나 엎드려 절하는 그에게 내려가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고맙소! 그러나 공은 이 일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일인 줄 아시오? 능히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일 것이오."
박제상은 임금님의 두 손을 맞잡고 꿇어 엎드려 감히 용안을 마주하니 임금님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루루 흐르고 있지 않는가! 이때 박제상은 하늘을 우러르면서 말하기를
"나라님의 심경이 이처럼 애절한데 충심으로 이를 헤아리는 신하라면 어찌 일의 어려움과 쉬움을 가릴 수 있으며 죽고 사는 것을 미리 생각한다면 어찌 임금과 나라를 생각하는 용맹있는 신하라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부족하나 상감마마의 두 아우님을 구출하여 나란히 사당에 들어가 열성조를 뵙도록 하오리다."
왕은 손수 술잔을 따라 그를 대접하여 먼저 고구려에 있는 아우 보해(寶海)를 구하여 오게하고, 그 다음 일본에 잡혀 있는 미해(美海)를 구해 오도록 명하셨다.
박제상은 스님으로 변복을 하고 먼저 북해(北海)로 가서 고구려에 들어갔다.
그는 스님의 행세를 하면서 세월을 보내며 찾은 끝에 보해가 억류된 곳을 알아내고서는 보해에게 접근하여 계림국에서 왕자님을 구해내기 위하여 여기까지 수소문하여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기의 이름이 박제상이라는 것을 밝히니 보해는 통곡을 하며 박제상의 의사에 따르기로 하였다. 박제상은 그곳을 벗어날 때까지 주위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해 오랜 기간 주민들과 친분 관계를 맺어 놓고 살았다.
약속한 당일 보해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를 대고 장수왕이 불러도 조회에 나가지 않고 박제상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 마침 사람이 찾아와 그날 삼경에 고성(高城) 수구(水口)로 찾아오면 배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그렇게 알아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야음을 틈타 고성 바닷가까지 갔을때 장수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의 군사를 풀어서 이들을 추격하여 잡게 하였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박제상과 보해의 인간 됨됨이를 아는 그들인지라 추격하면서 화살촉을 떼어버리고 활을 쏘았기 때문에 박제상은 몸을 상하지 아니하고 무사히 계림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박제상이 보해를 데리고 입궐하니 눌지왕은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고 즐기다가 밤이 깊어지자 임금은 다시 은밀히 박제상을 불렀었다.
"과연 그대는 짐의 은인이오. 그러나 아직 왜국에 억류된 동생 미해가 있소. 형제는 일신이라 마치 두 눈과 두 손발과 같소이다. 이제 경의 수고로 한쪽 눈과 한쪽 손발은 찾았으나 아직은 반쪽뿐이오. 왜국에 억류된 짐의 아우 미해마저 경이 구해 준다면 짐으로서는 이보다 더 큰 고마움이 없을 것이오."
하면서 왜국(倭國)에 억류된 미해를 생각하며 또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하여 박제상은 환영의 잔치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왜국으로 갈 차비를 차렸다.
한편 환영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던 그 즈음―. 박제상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복호를 구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하인을 시켜 집에서 키우던 말을 보내어 모시고 오도록 하였다. 하인은 임금님을 배알하고 박제상이 나올 때까지 궐문 밖에서 말을 잡고 기다리며 있었다 한다.
그때 박제상은 임금님과 무엇인가 나지막히 밀담을 주고 받았다. 미해를 구해온 이후에 임금님께서 박제상의 부인에게 하산을 권고할 때 밝혀진 내용이지만, 그가 한 말인즉
"신은 왜국에 가서 계림국을 배신하고 왔다고 할 것이오니 대왕께서는 신의 가족을 반역죄로 다스리소서. 그리고는 앞으로 신의 가솔(家率)들을 어디엔가 가두어 벌하소서. 너무 어려움은 겪게 하지 마시고 미해 왕제님을 구하여 도착할 때까지만, 어느 산속에 가두어 두었다가 돌아오면 그때 풀어 주소서. 그리하므로 신이 거짓 항복함을 왜인이 쉽게 믿도록 하소서. 분명 왜인은 간사하여 여러 모양으로 변장을 하고 금품을 살포하며 신의 항복에 대한 진의를 파악하고자 할 것입니다. 만약 신이 천명으로 살아오면 모르지만 신이 죽으면 우리 가족을 대왕님께 부탁하옵니다."
이렇게 은밀하게 당부했다.
박제상이 임금님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궐문 밖으로 나오니 하인이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으리! 마님께서 나으리를 모시고 오라 하셔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어서 말에 오르시지요."
"아니다. 나라님이 저토록 아우를 보고 싶어하는데 신하된 자가 어찌 한 시인들 사사로이 지체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긴급히 말을 몰아 금성을 떠났다.
이런 속 깊은 사연을 모르는 부인은 하인을 시켜 말을 보내었으니 머잖아 그 말을 타고 집으로 올 줄만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인이 숨가쁘게 뛰어와 제상의 부인 김씨에게 알렸다.
"마님, 마님! 나으리께서 방금 전에 저희들이 몰고 간 그 말을 받아타고는 왜국으로 간다면서 떠나셨습니다."
하지 않는가!이 말을 전해들은 부인은 자칫 잘못하면 영원히 남편을 볼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에 황급히 망덕사에서 나오다 그만 신발을 채 신지도 못하고 버선발로 거리로 뛰어 나왔다.
그때 마침 남편이 말을 타고 앞을 지나가므로 목이 터져라 연거푸 부르며 남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러나 얼마 달리지를 못하고 숨이 차 그만 지금의 망덕사 앞 개울가 모래사장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채 남쪽을 보니, 남편이 탄 말이 백사장(白沙場) 길을 먼지만 보얗게 남기며 손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래도 엉금엉금 기며 숨가쁘게 몇 미터를 더 따라 갔으나 불가함을 알고는 그만 모래사장에 풀썩 주저앉아 두 발을 버둥대며 땅을 치며 통곡을 하였다.
쓰러진 그녀는 두 다리를 뻗어 오래 발버둥치고 답답해 복장을 치며 울었다 하여, 훗날 그 자리를 장사(長沙)라 하고, 더이상 달리지 못하여 발버둥치다 뻗은 다리가 되니 혹은 벌지지(伐知旨)라 불리게 되었는데, 현재 경주 배반동 앞 개울이라 전한다.
남편을 뒤쫓다 쓰러진 부인의 모습은 정말 처절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친척들이 더이상 버려두었다간 죽을 것 같아, 급히 사람을 보내 어디 가서 말을 구해 오게 한 다음 부인을 태우고 박제상이 사라진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입실재를 넘어 율포 앞바다에 당도해 보니 이미 남편은 배에 타고서 손을 흔들어 주고 있지 않는가. 그녀는 목을 놓아 울면서 남편을 불렀으나 울부짖는 아내의 통곡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박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그를 태운 배는 창파에 흔들리며 바람을 타고 점점 멀어져 가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남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기 위하여 올라간 바위언덕이 진리(津里) 끝에 있는 동메이다. 부인은 이 언덕에 올라서서 배가 멀리멀리 살아질 때까지 언제까지나 울며 지켜보았다.
그후 그녀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몇날 며칠을 낮밤을 가리지 않고 슬피 울었다 한다.
그리고 한편 훗날 민간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박제상이 타고 갔던 말이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북토 아랫마을에 쓰러져 죽은 채로 발견했는데 그 말의 다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찰이 있었다 합니다.
「부인, 정말 미안하오! 어린 자식을 당신에게 맡기고 이렇게 왜국으로 떠나게 된 이 사람의 심정을 이해해 주시오. 나는 더이상 눌지왕의 신하로 머물고 싶지가 않소이다.
고구려의 복호를 구해 왔는데 또 왜국에 가서 미해 왕제를 구해 오라고 하니 이는 차마 사람으로서 할 짓이 못되오. 내가 당신을 만나고 떠나고자 했으나 왕은 자기 동생 구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단 하루도 금성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니 내 이제 왜국으로 가면 결코 다시 돌아오
지 아니하리다. 당신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잘 사시오. 미안합니다.」
그는 이미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말 나라님을 배신하는 것과 같은 사연을 써서 보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연은 끝내 부인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이 귀가 도중에 지쳐 죽었기 때문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박제상이 율포로 떠나갈 때 너무 심하게 말을 몰았기에 그 말이 너무 지쳐 집으로 찾아오다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주민들은 말의 무덤을 사람 무덤처럼 크게 쓰고 박제상의 충절을 가슴에 새기며 말무덤을 마능(馬陵)이라 불렀다 하는데 지금도 그 말무덤이 북토 아랫마을에 실재하고 있다.
한편 부인은 남편을 만나 보지 못하여 크게 상심한 나머지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이 관원들이 우루루 들이닥쳐서는
"댁의 남편 박제상은 나라 법을 어기고 밀항하여 왜나라에 건너가 항복하여 저들의 신하가 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하오. 이는 일가(一家)를 중벌로 멸함이 마땅하나 전날에 왕제 보해
를 구해온 공적을 감안하여 치술령 산속으로 귀양을 보내니 부인은 지금 당장 자녀들을 데리고 치술령으로 갈 준비를 하시오. 그곳은 부인의 남편이 항복하여 살고 있는 동해 건너 왜국땅을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니 산정에 올라가 부디 치성을 다하여 남편이 개심하고 돌아오도록 기원하시오! 나라에서 전날의 정분을 감안하여 그곳에다 움막을 지어 놓고 남편을 기다리며 생활할 수 있게 해 두겠소. 염려 말고 간단한 살림 도구와 가구를 챙겨 놓으시오. 내일 아침에 짐꾼들이 이곳으로 와서 입실 석계로 거쳐 치술령 산으로 갈 것입니다."
하지 않는가. 부인은 이 말을 듣고는 경악하며 남편의 입지를 변명하였다.
"그분은 절대로 왜왕에게 항복할 그런 분이 아니오. 필시 누군가의 모함이오."
애써 변명했으나 허사였다.
관원은 다시 말하기를
"나라님의 명령이니 더이상 우리도 어찌할 수 없소!"
이 소리를 듣자 기가 막히고 억울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이 미해를 구해 돌아올 때까지 그들이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그녀는 가솔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녀의 가솔들은 노루가 뛰어 내려와 놀았다는 노루목〔鹿洞〕길까지 말을 타고 갔지만 거기서 부터는 가파른 산길이라 짐꾼들은 모두 짐을 이고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랐다. 부인은 이제 다섯 살 난 아들 문량을 업고 속울음 울며 올랐다.
"박제상에게는 딸 셋, 아들 하나가 있었다고 했지요?"
"아마 첫딸의 이름이 아기이고 둘쩨딸 이름이 아영이며 셋쩨딸 이름이 아경이라 했지요."
하고 Y양이 대꾸를 했다.
"그래요, 열여덟 살된 큰딸은 짐꾼들과 같이 보자기에 싼 살림 기구를 머리에 이고 헐떡이며 올랐고 열다섯 살된 아영이는 동생 아경의 손목을 잡고 끌어주면서 올랐지요. 열세 살된 아경이는 한 손으로는 언니의 손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뻘뻘 땀을 흘리면서 오르다가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위로하는 듯 입을 열었다 해요."
"엄마, 엄마! 아버지만 돌아오시면 그땐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
"그래, 철없는 것아. 아버지는 꼭 오신다. 암, 오시고 말고!"
"엄마, 우리 아버지 아무 죄가 없다 그지? 죄가 없으면 다시 돌아오시지?"
"아무렴, 죄가 없고 말고. 그분이 어떠하신 어른인데 돌아오시고 말고. 돌아오시고 말고"
부인과 어린 자식들은 초죽검이 되어 겨우겨우 움막이 있는 곳까지 올랐다. 그후 그들은 산정의 움막집에서 살면서 날마다 정상 넘어「망부석」까지 올라가서는 동해를 향하여 절을 하고 기도를 하며 박제상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참샘 물을 길러 밥을 해먹고 그 위에다 베틀까지 차려 놓고 베를 짜기도 하면서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까 올라오면서 보고 설명한 바와 같이 부인은 그「베틀바위」에 앉아 딸들과 함께 번갈아 베를 짰다고 해요."
"네, 알아요. 그런데 일본으로 건너간 박제상은 어떻게 되었어요?"
왜국으로 건너간 박제상은 왜왕 앞에서 거짓으로 고하기를
"저는 계림국 5대왕인 파사왕(婆娑王)의 5대손이 오며 조부는 갈문왕(葛文王) 아도(阿道)이옵고 부친은 파진찬(波珍餐) 물품(勿品)이 온데 저를 따르는 백성이 많아지자 눌지왕(訥祗王)은 아무 죄도 없는 선대의 죄를 물어 저를 삽라군 태수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저를 유배시킨다 하기에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혼자 이렇게 도망하여 왔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 주시고 이곳에서 살도록 해주시면 신하의 도리를 다하며 모시겠나이다."
우선 박제상을 감옥에 넣어 두고 난 왜왕은 은밀하게 계림국으로 첩자를 풀어 과연 박제상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토록 하였다. 첩자는 박제상 가족의 행방을 염탐하며 찾았으나 어디에 있는지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탐문해 본 결과 모두 남편이 왜국으로 도망간 죄상을 물어 어디론가 귀양을 갔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첩자는 망덕사에서 50여 리 떨어진 박제상 처가가 있는 개운포(開雲浦;울산) 두동 그리고 배반 부근의 친가는 물론 그가 태수(太守)로 있었던 200여 리 떨어진 삽라군( 羅郡:지금의 경남 양산)으로 가서 확인하였다.
왜왕은 여러 경로로 사람을 보내 사실을 확인해 본 결과 드디어 박제상이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항복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이에 왜왕이 제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되어 가두어 두었던 박제상을 석방하여 거처할 집까지 마련해 주고 먹을 양식까지 주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였다.
"그 모든 것은 박제상이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떠나면서 처자권속을 반역의 죄로 다스려서 가두어 두라고 은밀하게 임금에게 당부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하! 그래서 박제상 부인이 이 산 위에서 살게 되었구나. 이「망부석」도 그래서 탄생된 바위군요."
"말하자면 그렇죠. 왕은 박제상의 당부대로 그의 가솔들을 첩첩산중인 이 치술령으로 보냈었지요. 그후 왜왕은 상당 기간 박제상의 일거일동을 빈틈없이 살폈으나 전혀 계림국을 생각하는 바가 없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판단 한 다음 그때부터 자기 곁에 두기까지 했다합니다. 심지어 왜왕은"계림국의 왕은 정녕 사람 볼 줄을 모르는구나. 박제상과 같은 인물을 쓰지 않고 어떤 자를 신하로 둘까. 허허!"
하면서 어느 신하보다도 박제상을 믿고 가까이 하였다 해요. 그러다가 결국은 미해와 함께 지내도록 까지 하였다지요.
그러던 어느 날 왜왕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놓고
"우리가 알고 보니 박제상은 아무런 죄도 없이 선대의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반역죄로 몰려 우리나라로 항복해 왔는데 내가 지금까지 먼 빛으로 두고 보았는데 이토록 의리 있고 지혜 있으며 총명한 사람을 보지 못했소. 박제상이 이제 이 나라의 신하가 된 이상 그의 가족 모두도 짐의 신하요 백성이다. 우리가 박공(朴公)의 부모처자를 계림국에서 고통을 받게 그냥 버려 둘 순 없지 않는가? 그렇게 내버려 둘 게 아니라 우리가 계림국을 공격하여 멸함이 어떻겠소? 그리하여 하루 속히 고통받고 있는 박공의 처자와 미사흔의 부모를 구해오도록 하여야 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계림국의 지리에 밝은 박제상과 미해를 선봉대장으로 하여 우리가 일제히 침습을 함이 어떠 하겠소?"
그때 박제상이 입을 열었다.
"소인으로 인하여 군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우리 군병이 죽게 되나이다. 지금은 계림국을 침략해도 우리 부모처자를 구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할 우려가 많습니다. 저들은 고구려국과도 친분관계를 돈독히 맺고 있어요. 전번 백제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계림이 고구려국과 힘을 합쳐 우리 왜를 침공한다고 하기에 사실 확인을 위해 정찰병을 파견하였더니 고구려 군사가 와서 우리 군사들을 모두 잡아 죽인 일을 보았다 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사실을 확인하였더니 우리 군사가 모두 전멸했음을 판명되지 않았습니까? 비록 저들이 우리 부모처자와 왕제(미해)님의 가족까지 모두 벌하여 구금했음은 심히 격분할 일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내 부모와 처자를 구해오고야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러하오니 소인의 부모형제 처자권속도 중요하지만 우리 군병들의 목숨 또한 더욱 귀한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소인으로 인하여 계림과 전생을 일으키면 저들 반도의 삼국은 힘을 합쳐 이나라를 침공해 올 것입니다. 그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공연히 난을 일으킨다는 것은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많습니다. 대왕께서는 분부하심을 거두어 주소서. 우리의 전력을 좀더 키워 일시에 전멸시켜야 우리쪽 손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하구 극구말렸다 한다. 이는 계림이 왜국의 침입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엄청난 피해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말한 후 박제상은 전혀 계림국의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고 미해와 함께 해변에 나가서 고기를 잡기도 하고 또 산으로 다니며 사냥을 하기도 하면서 노니는 것이었다.그때마다 그들은 얻은 새짐승이나 물고기를 왜왕에게 바치면서 아무 일도 없는듯 유유자적하였다.
박제상의 태도가 한결같거늘 왜왕은 참으로 자기의 신하가 된 줄 믿고 있었다. 박제상은 미해를 만난 후에도 본심을 밝히지 않고 몇 달을 함께 지내다가 그제야 계림국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사정을 하나하나 전해 주었다.
계림국에서는 볼모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고 있는 왕자를 기다리다 병이 들어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 내물왕의 이야기와 보위를 이은 형 눌지왕이 미해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야기를 들은 미해는 지금까지 원망했던 아버지께 용서를 빌었고 야속하다고 미워했던 형님께 고마움을 느끼면서 속울음을 울면서 돌아가신 아버님과 자신을 기다리는 형님을 그리워하면서 만날 날을 기다렸다.
그는 박제상의 지시에 따라 암암리에 계림국으로 돌아갈 만방의 준비를 다한 후, 안개가 자욱하게 낀 어느날 새벽 드디어 탈출을 결행하였다. 박제상은 미해에 재촉하며 말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지금 빨리 떠나십시오."
미해는 박제상의 옷깃을 잡고 애원했다.
"우리 같이 떠납시다"
그러나 박제상은 뿌리치면서
"신이 만일 같이 떠난다면 이를 눈치채고 왜선들이 뒤를 쫓아와 왕자님까지 잡히게 됩니다. 저는 이곳에 남아서 저들을 안심시키고 뒤를 쫓는 것을 막겠습니다."
"지금 나는 공을 부형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혼자 돌아가게 하시오? 그럴 수는 절대 없소이다. 여기에 남아 있으면 저들이 그대를 죽일 것이오. 그것이 너무도 뻔한 사실인데 어찌 혼자 떠날 수 있으리오. 안됩니다!"
하고 극구 불가함을 말하니 박제상은 미리 준비해 둔 술을 들고 나와 미해에게 권했다.
"지금은 시간이 급하오이다. 자― 이 술을 한 잔 신의 충의의 표시로 받아 드시고 빨리 떠나셔야 합니다. 마침 고국에서온 강구려(姜句麗)라는 청년이 있어 지금 배를 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험한 물길을 헤쳐 모시도록 하였으니 빨리 떠나시지요."
그러나 미해는 다시 한 번 간곡히 말하였다.
"제발 내 말을 들으시오. 여기 있으면 죽소. 같이 떠나야 합니다."
"신은 왕제님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신하가 임금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를 위하여 스스로 할일을 다하고 군왕을 기쁘게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어찌 신의 하찮은 목숨이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시고 어서 고국으로 돌아가셔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시는 형님을 만나 뵙고 자식을 기다리다 그것이 병이 되어 돌아가신 선대왕 혼령을 위로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더이상 지체하다가는 왜병들에게 발각되니 빨리 떠나십시오."
"난 정말 그렇게는 못하겠소!"
"시간이 없다니깐요, 빨리 떠나시오. 고국에 가시면 신의 처자를 왕제님께 부탁합니다."
기어이 미해를 고국으로 떠나보낸 후 박제상은 혼자 남아 있으면서 주변의 사람들이 그가 떠난 것을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였다.
날이 밝자 미해를 지키던 병졸들이 평소 같으면 일어나야 할 시간인데도 미해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고 침실 방문을 두드리니 박제상이 문을 열고 나와서 태연하게 말하기를
"미해공이 어제 사냥을 나갔다가 피곤한 탓으로 늦게까지 주무시지 못하시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드셨으니 깨우지 말고 주무시게 두어라."
하여 겨우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저녁때까지 미해가 보이지 아니 하니 그제서야 그의 방문을 열어 보고는 그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박제상은 태연히 껄껄 웃으며
"미해 왕제께서는 이미 계림국으로 떠난 지가 오래되었느니라!"
놀란 병졸들은 비로소 깨닫고 우왕좌왕하다가 이 사실을 왕에게 고했다. 격노한 왜왕은 급히 기병과 배를 풀어 그의 뒤를 쫓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멀리멀리 떠난 뒤였으므로 잡을 수 없었다.
그즈음 박제상의 부인은 이 바위 아래에서 밤을 새우며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지성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치술령 산신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듣거라! 그대의 남편 박제상은 지금 미해 왕제를 구해 보낸 후 혼자 남아 왜왕에게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살아서 돌아오기 심히 어렵게 되었으니 그렇게 알고 조정에서 부를 때 하산(下山)하여 자식들과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아라. 오는 10월 3일경에 왜국 목도에서 그대의 남편은 심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때는 정오일 것이다. 그때 동해 바다 목도에서는 반드시 흰 구름이나 붉은 구름이 솟아오르게 된다. 천에 하나 흰 구름이 솟아오르면 살아서 돌아 올 것이며, 붉은 구름이 솟아오르면 화형(火刑)을 당하여 죽은 혼백(魂魄)만 돌아올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하므로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꿈이었다.
치술령 산신의 현몽이 있던 그날 오후 계림국 조정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강구려라는 사람과 함께 왕이 꿈에도 그리던 미해 왕제가 왜국으로부터 탈출하여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때 왕은 사자를 보내 치술령 정상 움막에 살고 있는 박제상의 부인과 가족을 조정으로 모시고 오라 하였다.
왕명을 받은 사자가 치술령 정상에 올라와 하산할 것을 권유하면서 말하기를.
"부인의 남편이신 박제상 공께서는 왜국으로 떠나실 때 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계책으로 부인을 이 산정에 살도록 한 것이오니 부디 노여움을 풀고 미해 왕제를 맞이하는 나라님의 환영회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이번 잔치에는 부인에게 국대부인(國大夫人)의 칭호를 내리신다 하오니 성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완강하게 거절을 하면서 말했다.
"이제 나라님께서 뜻을 이루시어 미해 왕제님을 마주 대하게 되었으니 이나라의 백성된 자 모두가 기뻐하올 일이나, 아직 지아비의 생사조차 묘연한데 아낙된 처지로 어찌 남편이 참석하지 못하는 그 자리에 가서 나라님이 내리시는 광영을 받을 수 있으리오. 제 남편이 살아 돌아오실 그때까지 저는 이 산정에서 기다리겠나이다."
하였다. 딸 셋도 한결같이 하산하기를 거부했다. 그들 가족을 하산시키는데 실패한 사자들은 이렇게 하여 그날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 시월 초삼일 동해에서 붉은 구름이 치솟아 오르면 죽어 돌아오고 흰 구름이 치솟아 오르면 살아 돌아온다고 몽시 한 바로 그날이었다.
다른 날은 기도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베틀에 앉아 베를 짜면서 세월을 보냈는데, 그날은 꼭두 새벽부터 기도를 하기 위해 간 어머니가 아침을 먹을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 하니 첫딸 아기가 어머니가 정성드리는 그 바위 곁으로 갔다. 어머니는 마악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너무나 진지하게 기도에 몰입해 있는지라 그 관경을 보고는 입도 열지 못하고 돌아와 아침식사를 끝내고 어머니 대신에 베틀에 앉아 베를 짰다. 그러다가 점심때가 되어 어머니를 모시려 갔으나 그때가지도 여전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으므로 도로 내려와 있으려니 이심전심이랄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왔다. 행여나 싶어 어머니에게 달려가니 이를 본 아경이도 언니 뒤를 따라 움막집에서 치술령 정상 밑의 지름길로 달려갔다.
그때 마침 남동생 문량을 업고 있던 야영이는 뛰지를 못하고 언니들을 뒤따라 헐떡거리며 바위 곁으로 갈 때였다. 동해 위의 하늘을 바라보니 마침 검붉은 구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 하고 부르는 큰언니의 외침이 들리자. 이어 '엄마, 엄마!' 하는 여동생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영이가 거의 치술령 정상에 왔을 때 한 마리의 어미 백조가 검붉게 솟아오르는 동천의 구름을 향해 가물가물 날아가 그만 붉은 구름 속으로 숨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퍼뜩 그녀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그토록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혼이 혹시 백조가 되어 오매불망하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며 정상 남동쪽 10m 아래에 있는 기도처인「망부석」에 다달았을 때였다. 두 마리의 어린 백조가 또 날아올라 빙글빙글 돌더니 구름 속으로 숨은 어미 백조를 찾지 못하고는 그만 국수봉 아래 바위틈의 굴속으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바위에까지 온 아영은 어머니와 언니와 여동생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아 비탈길을 헤집고 바위 아래 어머니가 기도드리던 굴쪽으로 가보니 어머니와 언니와 여동생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어 있었고 사방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순간 아영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이 세상 난들 살아서 무얼 하리오.' 하고 도로 바위 위로 올라가 문량을 업고 뛰어 내리어 자결하려 하니 문량이가 악을 쓰면서
"누나야, 난 죽기 싫다! 무섭다! 누나가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누구하고 살아야 하니?"
하고 울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아영은 크게 깨달아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마저 죽으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누가 묻으며 나의 언니와 여동생의 시신을 누가 거두리오. 또 우리 영해박씨 대를 이을 하나뿐인 내 동생 문량이를 누가 키울 것인가!"
하고는 지치도록 울다 움막으로 되돌아 가려하니 눈앞이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다.
다음날에 이르러 나라의 벼슬아치들이 올라와 이 참경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우선 두 딸의 시신을 거두어 은을암이 마주 보이는 현재의 「세 효녀아기(阿奇)바위」부근 어디엔가 묻었다 한다.
그후 나라에서는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국수봉 아래 바위틈으로 새가 날아 들어갔다는 아영의 말을 듣고 그 바위에 암자를 지어 주었고, 바위이름을 새가 숨어들어간 바위라 하여「은을암(隱乙岩)」이라 불렀다.
또한 박제상부인의 시신을 거두어 금성으로 운구하여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예우하여 장례를 치르고 묘소는 망덕사 부근 어디엔가 묻고 그 혼은 망덕사에 안치했다 한다.
한사코 이곳에 남아 어머니의 뒤를 따라 떨어져 죽겠다고 버티던 아영이도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한입으로 문량이를 키워야 할 책임이 아영에게 있음을 알리었고, 또 철없는 어린 문량이가 하도 울어대며 집으로 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어찌할 수 없이 산에서 내려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렇지, 어린 너를 버리고 나마져 죽으면 누가 우리 문량이를 돌보랴!"
"그뒤 문무대신들도 물론 권고를 했지만 박제상의 희생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미해 왕제는 각별하게 아영과 문량를 자택으로 데리고 갔고 나중에는 아영을 아내로 맞았다고 한다."
"그때 왜국에 있는 박제상은 어떻게 되었어요?"
H기자가 물었다.
"한편 그날 그시에 왜국에서는 동서고금에 다시없을 무시무시한 형벌로 박제상을 심문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을 투옥시킨 다음날부터 몸소 찾아가 문책하기 시작했어요.
'너는 어찌하여 허락도 받지 않고 계림의 왕자를 돌려보냈느냐? 너는 짐과 약속하기를 나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다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물음에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왕의 신하가 아니오. 무모하게 우리와 화친을 하겠다는 빌미로 우리의 왕자를 이곳에다 억류하고 인질로 삼은지가 30년이 지났소! 내 어찌 이토록 인정도 의리도 없는 개돼지같은 왜나라왕의 신하가 되겠소. 10세의 어린 나이에 이곳에서 억류된 채 고생하신 왕제 미해공의 아픔은 물론이요 어린 자식을 타국에 보내고 밤낮 그리다 그것이 병이 되어 돌아가신 전대 왕의 심정을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보았소? 동생을 인질로 두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나라님의 수치를 생각해 보았는지요? 짐승인 개와 소도 새끼를 잃으면 어미와 새끼가 밤낮 목놓아 울면서 서로를 찾고 부르는데 하물며 사람의 탈을 쓰고서 부모와 자식을 서로 떼어 놓고 즐거워하는 그대를 내 어찌 주인으로 섬기겠소?"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노기 충천한 왜왕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너도 사내 대장부로서 한 입 가지고 두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너는 이미 나에게 신하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미 나의 신하가 되어 있는데도 내 앞에서 감히 계림의 신하라고 주둥아리를 놀리느냐?"
"내 비록 왕제 구하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을 했지만 그 동안 모든 정성을 다해 받들어 오지 않았소. 그대도 사람이라면 이런 충정을 헤아려 지난날 우리 왕제님을 억류시킨 잘못을 용서 빌고, 계림국과의 화친을 위하여 지금이라도 이몸을 계림국으로 보내주는 것이 대인다운 행동일 것이요. 진정 그릇이 큰 왕이라면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고 계림국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왜왕은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을 떨며
"못할 말이 없구나! 정녕 내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내가 오형(五刑)으로 너를 벌하리라. 오형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느냐? 네 얼굴과 온몸에 먹물을 넣어 문신을 새기고, 네 코를 베고, 네 발 뒤꿈치를 베고, 네 불알을 잘라 버린 후, 마지막으로 네놈을 불 속에 넣어 태운 후 목을 베어 화장하는 형벌이 오형이니라. 이래도 좋으냐? 네가 지금이라도 계림의 신하가 아니고 짐의 신하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해 줄 뿐 아니라 내 친히 너에게 후한 벼슬을 줄 것이니 어떻게 할 것인가?"
달래니 박제상은 하늘을 향해 크게 웃고
"가소로운 일이로다! 내 차라리 의리를 생명같이 지키고 예의를 존중할 줄 아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여우나 승냥이보다 더 간사하게 자기 뱃속만 채우고 이웃간의 정의를 헌신짝같이 버리는 왜나라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내 비록 군자의 나라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짐승만도 못한 왜국의 벼슬은 결코 받지 않으리니 나를 계림으로 보내 주기 싫거든 빨리 죽여 주시오!"
하였다. 이에 왜왕은 박제상의 발바닥의 가죽을 전부 벗기고 쐐기풀을 깔아 놓고 그 위를 걷도록 하였다. 피가 범벅이 된 박제상의 발걸음이 쐐기풀에 닿을 때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왜왕을 노려보며 고함치기를
"천 년을 두고 만 년을 두고 네놈이 내게 행한 이 형벌이 얼마나 무모한 형벌이었는지 이 쐐기풀은 증거하리다. 그때마다 네놈의 후손들은 너의 무덤을 파헤치며 짐승보다 못한 조상이라 원망하리다!"
하며 마구 뛰어다니니 발바닥에서 흐르는 선지피가 자욱자욱 쐐기풀 위에 떨어져 온통 붉게 물들었다. 박제상이 이때 외친 예언대로 이듬해부터 쐐기풀이 돋자 잎에는 이상하게도 피빛인 양 얼룩이 있었다 한다.
박제상을 쐐기풀 위로 걷게 한 뒤 왜왕은 다시 물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고 짐의 신하라고 하라. 그렇게 한다면 지금까지 무례하게 굴었던 너를 용서하리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고?"
"답답한 위인이여! 어찌 그리 사람 볼 줄을 모르느냐? 내 계림국의 혼을 받아 오늘까지 살아 왔거늘 육신의 형벌로 어찌 계림의 정신을 항복 받으려 하느냐? 백번을 말해도 나는 계림의 신하다! 더이상 어리석은 질문하지 말아라!"
그러자 왜왕은 형리를 시켜 땅바닥에 높이 1자 반쯤 되는 돌을 9군데 놓고 그 위에다 수천 개의 못을 박은 철판을 깔게 했다. 그러고나서 열 짐의 장작으로 철판을 이글이글 달군 후 이번에는 피투성이가 된 맨발로 그 위로 걷게 하였다. 철판은 물론 못 끝까지 벌겋게 달아
오른 그 위로 발길을 옮길 때마다 붉게 달구어진 못은 발등을 뚫고 살갗이 붙은 채 튀어 오르고, 살갗이 철판에 닿을 때마다 지지직 소리를 내며 시커먼 연기와 함께 타들어갔다.
그렇게 형벌을 가하며 왜왕은 또 외쳤다.
"이래도 계림의 신하냐?"
"으하하하!"
박제상은 미친듯 뛰며 고함을 질렀다.
"내 육체는 비록 네놈의 나라에 붙들려 이 고초를 당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계림에 가 있는지 오래다. 으하하하! 답답하고 답답하구나. 이까짓 계림의 신하 몸둥아리 하나 죽이려고 임금이라는 주제에 체통도 없이 이런 천고에 다시 없는 형벌을 가하느라 고생을 하느냐? 너는 필시 천벌을 피할 수 없으니 행한대로 받으리라. 내 이제 몸은 비록 여기에서 한 줌의 재로 버려질지라도 계림의 정신을 가지고 저 하늘의 구름이 되어 고국으로 갈 것이다. 내가 죽고난 후 얼마나 무모하고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알게 되리라!"
하고 쓰러졌다. 왜왕은 쓰러진 박제상을 다시 일으켜 설득해 보려했지만 어떠한 형벌로도 항복을 받아낼 수 없음을 깨닫고는 목도라는 갈대섬으로 보내었다. 그곳에서 갈대를 산처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그 불꽃 속에 쓰러진 박제상을 던져 넣어 태워 죽였다. 불꽃은 검붉은 연기와 함께 하늘 높이 치솟아 대낮인데도 태양이 빛을 잃고 사방 천지에 불꽃이 비치어 환히 빛났다고 한다. 이때가 서기 438년 눌지왕 22년 가을 10월 3일 정오였다는데, 이것이「망부석」바위에 얽힌 전설입니다."
"전설도 전설이지만 그 내용을 이렇듯 자세히 알고 있는 김백호 선생은 과연 치술령 산신이 점지한 분입니다. 역사적으로 베일에 싸여 있는 수수께기를 속시원하게 모두 풀어주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전 아무 것도 몰라요. E교수님은 정말 많이 알고 계셨는데, 그분에 비하면…… 불행하게도 58세를 일기로 몇 해 전에 심장마비로 돌아 가셨어요……"
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줄자를 펴며 바위에서 일어났다.
"자, 우리 이곳의 실제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한 번 재어 봅시다."
그들도 나를 따라 같이 일어났다.
N기자와 나는 줄자를 가지고「망부석」의 높이가 얼마인지 확인해 보았다. 정확하게 18m 85Cm였다.
그리고 가장 넓은 윗면의 가로길이가 11m 16cm 정도였다. 나는 줄자를 접어 넣고는 다시 앉았다.
이곳이「망부석」임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이들에게 대마도의 목도를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 동안 남동해를 주시하였다.
아득한 남동해 저 멀리서 거무스레하게 목도가 보이는 것이었다. 즉시 준비해 온 배낭 속에서 망원경을 꺼내 그곳으로 촛점을 맞추었다.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망원경을 Y양에게 주었다.
"오늘은 맨눈으로도 목도가 보이는군요. 그러나 이 망원경으로 보십시오. 더 선명히 보일 것입니다."
N씨도 옆에 앉았다.
"야! 정말이네요. 목도도 목도지만 정말 속이 다 시원합니다. 저 하늘과 바다! 너무너무 아름답네요."
"오늘은 바람이 없고 날씨가 청명하니 다른 날보다 더 잘 보일 것입니다. 저 남남동쪽 수평선 끝을 봐요. 큰배들이 여럿 있는데 맨 남쪽 부근을 봐요. 그 배가 있는데서 조금만 더 남쪽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수평선과 맞물린 산 같은 것이 보이지요?"
"어디에요? 아아, 예. 정말 보이네요. 저 섬이 목도라 말이죠?"
망원경은 다시 N기자에게 넘어 갔다. N기자도 감탄을 연발하면서 소년처럼 기뻐하였다.
"자, 우리 그럼 일어나 소위 울산시에서 세운 표지판이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으로 한 번 가 봅시다. 어떤 바위를「망부석」이라 하고 있는지……"
나는 정상으로 도로 올라와 그들이「망부석」이라 주장하는 서남쪽 등선을 타고 한 300m~350m쯤 걸어 중턱으로 내려갔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바위는 우리가 초등학교때 소풍을 와서 선생님을 따라 내려와 본「효녀아기바위」 세 개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그냥 넓적한 바위 세 개가 있고 조그마한 바위 하나는 따로 아래에 있었다. 줄자로 재어 보았다. 동쪽에 있는 가장 높은 바위가 4m 20cm도 채 안되었다. 그 바위 위에다「망부석」이라는 글을 커다랗게 새긴 것이다. 나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소위 문화재를 관리한다는 울산시정(市政)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이런 몰상식한 행동을 할 수 있담!)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폭언이 나오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자연파괴범이 어디 있나. 김일성이 금강산 바위마다 자기 이름을 새겨 두었다더니 여기도 그와 흡사한 일이 공공 기관에서 행하고 있구나! 세상에 자연석에다「망부석」이라 글을 새기다니! 정녕코 이 돌을「망부석」이라 주장하고 싶으면 망부석을 아끼는 마음으로 아니 원형보존의 차원에서라도 따로 대리석을 세워 기념비를 만드는 것이 문화행정의 도리이지. 시민들에게 자연보호를 가르치고 문화재 보호를 외치는 자가 이런 행위를 자행하다니! 이것이야말로 관에서 자연 파괴행위를 앞장서서 행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게 아무 바위에나「망부석」이라 새겨 두면 그 바위가「망부석」이 되나. 허허허!"
H기자가 웃었다.
"자, 보십시오. 내가 여기서 한 번 떨어져 보리다."
하고 나는 그 바위 위에 올라가서 풀쩍 아래로 뛰어 내렸다.
"여기서는 뛰어내려 자결하려 해도 박제상 부인이 전혀 죽을 가망이 없겠구먼. 다쳤으면 다쳤지…… 허허허!"
N기자가 뛰어내려서 바위 아래 있는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러게 여인의 몸으로는 무리이지만 죽지는 않겠네요."
"여기서도 목도인 대마도가 보이는가 한 번 봅시다. 네?"
Y기자가 말했다.
나는 다시 바위 위로 올라가 망원경으로 동해 바다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살펴도 대마도는 보이지 않았다.
"울산시에서 뭔가 잘못한 것 것 같네요."
나는 망원경을 N기자에게 주었다.
N기자도 보다가 찾지 못하고 망원경을 Y양에게 넘겨주면서 말한다.
"자 Y기자님도 한 번 보세요. 위치가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이곳을「망부석」이라 해서 될성 싶지가 않는데요? H신문에는 어떻게 발표하려고 해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본 후
"정말 그렇군요.「망부석」은 녹동 산 161번지에 있는 바위가 맞는데 울산시에서 이토록 힘을 쓰며 경상남도 지방문화재 제90호로 지정까지 하여 둔 것을 보면 무엇인가 다른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너무 섣불리 취급하였다가는 시비가 될 것입니다. 서서히 진실을 밝혀 각계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바로잡아질 것입니다.「망부석」 아닌 돌을「망부석」이라 주장하다 그래도 미심쩍으니까 아예 돌에다 글까지 새겨둔 것 아니겠어요. 나름대로는 아마 역사적인 근거와 사실을 만들어 학술적으로 뒷받침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공연하게 시빗거리가 되는 기사는 접어 두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아요."
그러자 N기자도 덩달아 말했다.
"잘잘못은 앞으로 사학계에서 가려 갈 일이지 신문사에서 문제화할 과제가 아니지요."
"무슨 말씀이 그래요?"
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에겐 학술적인 자료가 전혀 없었고 다만 선대로부터 들은 이야기뿐이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박제상 전설의「망부석」은 녹동 산161번지에 있는 18m 85Cm 높이의 커다란 그 바위라는 사실 외에는…….
"그렇다면 지금 경주시에서는 가장 위대한 서라벌의 혼이요 충효열 정신문화의 유산인「망부석」을 울산시에게 빼앗긴 격이 되고 말았네요. 나도 사실 막연히 치술령 산중에「망부석」이 있다고만 알았지 치술령 어느 위치, 어디쯤에 그 바위가 있다는 기록이 없어서 오늘 시간을 내어 함께 탐방을 해 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충효열이 신라에서부터 이어온 경주인(慶州人)의 정신문화의 뿌리라 한다면 그 상징인「망부석」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려선 안되지요."
N기자의 말이다.
"그러게 울산에서는 어느 기회를 포착하여「망부석」이 의미하는 정신세계의 본보기가 얼마나 울산시민의 정서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저처럼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치산서원을 보수· 증축하고 도로를 닦고 진짜「망부석」이 아닌데도 그럴듯한 위치의 바위에다「망부석」이라 크게 각인까지 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해두면 먼 후대에 가서는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로 전락되고 말 것이라 믿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라고 생각해요."
Y양은 이렇게 말하면서 동정의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오산이고 말고요. 우리 선친이 윗대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망부석」을 직접 나를 데리고 답사를 하시며 설명하셨듯이 나 또한 오늘 N선생이나 Y기자에게 알려주게 되는 것 아닙니까? 틀림없이 Y기자님도 훗날 친구나 다른 누구에게 저「망부석」을 알려주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후대에도 그렇게 되기 때문에 다른 바위에다「망부석」이라 각인해 두었다고 해도 진실은 변할 수 없고 가짜가 진짜로 될 수는 없다고 보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누가 이것이 진짜고 저것이 가짜라고 일일이 나서서 설명하지 않는 이상……. 먼 훗날 사학자가 누구 말을 들을까요. 관심을 가지고 답사를 간다 해도「망부석」이라 각인한 그 자리에 돌이끼가 끼고 풍상에 변절이 되면 그 걸 믿기 쉽지요. 그렇지 않다 해도 우리 세대에 바로잡지 않으면 훗날 시비거리가 되게 되어 있어요. 이런 시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경주시 당국에서「망부석」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박물관, 문화재연구소, 문화원, 향토의 대학연구소 등과 협조하여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강구해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표석(表石)도 세우고요……"
"비록 산속에 있는 바위이지만 그 바위에 얽힌 사연이 신라정신의 튼튼한 밑바탕인 충효열의 뿌리가 된다면 문제가 다르지요. 신하가 나라를 위해 스스로 자기를 버릴 줄 알고, 거기에 지애비를 따르는 아내의 열행, 어머니의 처참한 죽음 앞에 딸들은 목숨을 바쳐 효(孝)를 하고요, 동생을 훌륭히 키우기 위해 홀로 남은 둘째딸의 아픈 마음은 의(義)를 나타냄에 부족함이 없어요, 그건 석굴암 이상의 가치가 있음이 아니겠어요? 그 누가 알랴,
앞으로 치술령 일대가 관광개발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를, 그때 가서는 저 바위가 천금보다 더 가치가 있게 될 텐데!「망부석」이 어느 지역에 있건 우리 한국에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 할지 모르나 그래도 진실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어디까지나「망부석」은「망부석」이라야 한다고 나는 보아요. 모든 역사적 사실과 현장이 일치가 되어야 신빙성이 있을 것 아니어요. 안 그래요? 기자님, 기자의 소임이 무어요? 진실을 보고 그것을 솔직하게 밝혀서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것 아니오? 사실을 왜곡하여 아무 돌에나「망부석」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홍보를 한다고 해서 그 돌이「망부석」이 될 수는 있어요!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경남 울산시 당국에서「망부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 바위는 가짜「망부석」이라고 기사화 시켜주어요."
"학술적으로 증명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도 할 수 있는데……. 아마 울산쪽에서 저렇게 할 때는 뭔가 역사적인 자료를 확보한 후에 만든 것일 텐데. 김백호 선생께서 경주시청 문화과로 찾아가서 문화재계 담당자와 함께 직접「망부석」을 탐방하여 경주시의 문화재임을 학술적으로 밝혀 주장함이 마땅하다고 보아요. 아무리 문화유적이 많은 경주시라고 하나 서라벌의 혼이 담긴「망부석」을 그렇게 쉬 잃어버려서는 안되지요. 박제상가(朴堤上家)의 충효의열(忠孝義烈) 4절(四節)의 상징적 유산인「망부석」을 잃어버리고는 경주를 '신라의 얼이 면면이 흐르는 곳'이라 자랑할 수 없지요."
"그렇지요."
해질 무렵에 영봉에서 내려와 시래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서나무가 있는 아래쪽의 묘지에 앉아서 치술령을 바라보았다.
나는 기자에게 치술령을 바라보며「망부석」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오르내리며 그들에게 이야기한 전설과 사실을 요약하면서 일일이 다시 설명했다.
"저기 보이는 바로 저 바위가「망부석」이요. 치술령 정상 남동쪽 바로 밑에 있는 저 바위 말입니다. 치술령은 해발 765m 이지요.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하루 일정의 등산 코스로는 안성맞춤인 거리이지요. 대부분의 경주사람들은 치술령을 울산 지역의 산으로 착각을 하는데 치술령은 경상북도 경주시 지역의 산으로 치술령 일대는「망부석」을 포함하여 녹동 산 161번지이고 정상 부분은 외동 녹동 산 161―1번지입니다.
남북으로 뻗혀 있는 저 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능선 서편 줄기만이 경남 지역으로 울산시 범서면 두동면·반동·비조·칠조·만화리 등에 접해 있고 그 동편과 북편은 모두 경북 지역입니다.
사람 얼굴로 치면「망부석」은 치술령 오른쪽 눈에 위치해 있는 높은 바위입니다. 이「망부석」에 가려면 오늘 우리가 갔던 경주시 외동읍 모화의 석계나 녹동리에서 치술령 정상으로 오르거나, 내남면 봉계리 쪽에 사시는 분이라면 경남 두동면 칠조리나 만화리에서 올라가면 됩니다. 울산에서 간다면 울산 관문 성저의 덕걸 남방 반동쪽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가장 가깝지요. 그리고 이 바위에 오르려면 반드시 정상에서 동남(녹동)쪽으로 난 능선의 오솔길을 타고 10m 정도 내려가다보면 처음으로 나타나는 영봉(嶺峰)에 붙어있는 바위가 보이면 그 바위가「망부석」이라는 것을 알고 올라가야 합니다.
「망부석」은 영봉의 가파른 절벽에 붙어있는 바위라 실제로 위에 올라가 보지 않고는 이 바위가 얼마나 높은지 실감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올라가 보셔서 두 분은 잘 알겠지만 정작 그 바위에 올라가 보면 올라섬과 동시에 누구나 다 한 번쯤은 놀라지요. 지금은 나무가 숲을 이루며 자라 골이 잘 안보이지만 예전에는 천인단애(千 斷崖)의 깊은 골이 눈앞에 펼쳐져 간담이 서늘해지고 눈앞이 아찔해지며 온몸이 오싹해집니다. 동해를 바라보면 동대산 바로 아랫 마을을 제외하고는 아득한 바다가 모두 보이지요. 날씨만 청명하면 일본 목도(木島)까지 보입니다. 그 목도에서는 박제상이 화형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 바위는 바위의 중앙이 임산부의 배처럼 나와 있어 바위 위에서는 바위 아래의 사람을 볼 수 없고 아래에서는 바위 위에 사람이 앉아 있어도 그 사람을 볼 수 없지요. 오늘 확인한 바와 같이「망부석」은 높이가 18m 85Cm나 되는 데다 벼랑에서 치솟은 바위라 골짜기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골 끝이 까마득하지요.
그리고 봉우리와 붙어있는「망부석」 상단 윗면에는 시체 한 구 묻을 정도의 틈새와 평지가 있었는데 그 틈 사이가 또한「망부석」 전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지요.
떨어져 죽은 국대부인을 눌지왕은 성대하게 장례식을 거행하고 망덕사지 부근 어디엔가 묘를 써 두었는데, 그 아들 문량이 뒤에 어머니의 유해를「망부석」 바위 위에다 이장(移葬)을 하여 목도에서 죽은 남편을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을 말해 드렸지요.
저 바위 아래에는 한 사람이 촛불을 켜 놓고 정성을 드릴 정도의 작은 굴로 된 방이 있었지요. 이 굴속에서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를 지성드리다 깜박 잠이 든 순간 치술령 산신이 부인에게 나타나 현몽을 했다고 했지요. 목도에서 흰 구름이 솟아오르면 남편이 살아 돌아오고 붉은 구름이 솟아오르면 남편이 화형을 당할 것이라는 몽시였지요.
또 저 바위에 얽힌 중요한 전설의 중 하나가 저런 고지대에 있는 바위인데도 불구하고 바위 오른쪽 상단 중앙 틈새에서는 시시때때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은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을 보고 박제상부인의 원혼의 눈물이라고 전한다 했지요.
그리고 또 치술령 정상 북편에는「베틀바위」라는 바위가 있는 것을 확인했지요.
정상으로 오를 때나 내려올 때 보셨지만 좁은 능선 길 서쪽편에 베틀모양으로 널브러진 바위가 연속 삼단으로 서 있었지요. 바위가 10년 전만 해도 잘 보였는데 지금은 수목이 자라서 보이지 않지요. 그 바위는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며 박제상 부인과 딸들이 베틀을 차려 놓고 베를 짰던「베틀바위」라 전해요. 그 높이가 7m이고, 중간 잉아와 놀림끈과 가로대가 있는 바위는 12계단의 축을 5m 쌓아 올린 높이의 돌이며, 맨 윗쪽 바위는 뒷기둥 말코 앉을깨가 있는 곳으로 2.5m 높이의 바위입니다.
바위를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베틀과 같이 보인다 하여「베틀바위」라 한답니다.
「베틀바위」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내려가면 그들이 움막집을 지어 놓고 살았다는 평지가 있었지요. 그 평지 동쪽 산비탈에 움막집터가 있음직한 빈터가 있고 또 채전답 정도 일구었을 듯한 공간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을 우리가 보고 왔지요.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국대부인의 가족이 다녔다는 돌계단이 라는 것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없더군요. 박정희 대통령이 저 곳에다 헬기장을 만들면서 땅 일부를 파손시켰고 돌을 모두 파내서 길을 보수하느라 지금은 그 돌계단 흔적조차 없어졌어요. 거기서 능선 동쪽 벼랑 끝에 내려서면 곧장 참샘터가 있지요. 바로 저 오른쪽 겨드랑 밑 젖가슴이 되는 위치입니다.
이 샘을「참샘」「참물래기샘」이라 하는데, 오늘 우리가 물을 먹고 점심을 지어먹은 장소입니다. 보신 바 그대로 바위 틈에서 맑은 물이 촐촐 끊임없이 새어 나오지요. 박제상 가솔이 산정 유배생활 중에 움막집에 살면서 먹었던 참샘인데 아직도 변함없이 새어 나옵니다.
칠년대한에도 이 물은 마르지 않고 솟아오른다 합니다. 여름에는 이가 시리도록 차갑고 겨울에는 부근의 풀이 얼지 않을 정도로 물이 따뜻하지요."
"정말 잘 알았습니다. 오늘 너무 고맙습니다. 많이 배웠고요. 이제는 어디 가서「망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조금은 할 것 같습니다."
"자, 이제 그만 집으로 갑시다. 늦었는데 저녁 식사라도 해야지요."
제3부 단편소설 치술령 망부석 정다운―.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바로 저 여성이다. 저 여성이야말로 바로 내가 찾는 나의 여인상이다.' 그녀는 1m 72cm 정도의 후리후리한 키에 장미꽃처럼 화사하고도 넉넉한 얼굴을 가지고 있 었다. 눈웃음을 머금은 채 한 손으로는 회색 체육복 하의의 잔주름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왜 호(號)를 구태어 한별이라 지었어요? 누가 지어 준 이름이에요?" 주홍빛 립스틱을 짙게 칠한 오목한 입술은 초승달과 만승달을 마주 포개어 둔 듯한데 한별 선생님을 바라보고 묻는 그 모습은 실로 매혹적이며 요염하였다. 요염하다기보다 한 송이 의 향기 진동하는 홍초화 그 자체였다. 그 홍초화 위로 구름 속에 숨었다 비추는 찬란한 아침 햇살이 소나기처럼 함북 쏟아지니 그녀의 얼굴은 금시 화려한 모란꽃〔木蓮花〕로 변 하였다. 하늘에 살다 지상으로 금방 내려온 선녀같이 아름다웠다. 회색 체육복에다 검정색 운동화를 신었지만 그 풍만한 가슴과 날씬한 몸매는 매력이 흘러 넘쳤다. "우리 학교 흥사단 서클에서는 회원들끼리 서로 부를 때 이름보다 호(號)를 부르고 있어. 그래서 나는 북극성(北極星)이라 했는데 친우들이 한별이라 자꾸 부르니 그것이 그만 나의 호가 된 것이야. 어때 호가?" "좋은 데요…. 하나의 별, 그게 북극성이죠 뭐. 한별 선생님! 호호호…. 근데 치술령 산이 어딘데요? 저기 우뚝 솟은 저 산이 치술령인가요?" 오늘 우리들 일행 넷은― 이웃마을 물탕골에 사는 박꽃맘에게 부산에 있는 친구가 찾아오 기로 해서 여기에 의기상통한 우리학교 한별 선생님이 안내를 맡기로 했고 나는 팔자에 없 는 짐꾼이 되어 등산배낭을 지고 따르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늘 한별 선생님을 위시 해서 정다운․ 박꽃맘과나 흰빛곰은 치술령의「망부석」을 답사키로 하고 이렇게 모인 것 이다. 한별 선생님의 집으로 들어가며 나는 목청을 높이며 물었다. "무슨 말씀들을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준비는 다 된 것입니까?" "그래, 이제 가면 된다. 오늘 내가 흰빛곰을 데리고 치술령 등정을 하는 목적은 저「망부 석」에 올라가서 한국의 충효열의 혼을 심어 주기 위해서다. 알겠는가? 1145년 고려 인종 23년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 권 제45 열전 제5에 있는 충절공 박제상의 이야기 나, 1281년 고려 충렬왕 8년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내물왕조에 나오 는 김제상 이야기나, 이조시대에 와서 1797년 정조 21년에 이병모(李秉模)가 왕명에 따라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합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펴냈 는데 이야기의 핵심적 인물이 되는 분 중의 한 분이 박제상이다. 너희들 셋을 모두 데리고 치술령에 가는 것은 바로 그분 일가족의 충효열의 현장인 치술령 일대를 탐사하므로 그 정 신을 본받자는 것이다. 박제상을 통해 남아의 충정과 일편단심을 배우고, 부인의 행신을 통해 열행과 절개(節槪)도 배우고, 세 딸을 통해 효심과 우애를 배우기 위해 현장을 답사 하자는 것이다. 후일 문량이가 성장하여 살아 생전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리다 치술령「망부석」 높은 바위 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길고 긴 시간 그 높고 외진 산위에서 어머니는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면서 돌아가셨을까. 그 심정을 헤아려 위로하고자 하는 효심으로 망 덕사 부근에 안치되었던 어머니의 유골을「망부석」 바로 위에다 이장하였고 그로 인해 문 량은 관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어. 이유인즉 어머니의 유골을 치술령 정상에 모신 것은 용상을 노리는 저의가 있기 때문이라 고 모함당하여 추방된 것이다. 순수한 효심에 의한 행위를 두고 용상을 노리는 모반으로 간주하려 하니 그는 자비왕의 명 석치 못함을 탓하면서 어머니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현재의 두동면 만화리 치산서원이 있 는 곳으로 옮겨 모셨다 한다. 이후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풀뿌리와 나무 열매를 먹으며 평소 즐겨 탔던 가야금을 타면서 살았다 한다. 후일 그를 일러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전하니 그는 한 벌의 옷을 죽을 때까지 기워 입고 지냈으므로 그를 보고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전한다. 오늘 선비요 예술인인 백결 선생의 청빈정신도 배워야지." "박제상의 충절이나 아내의 열행은 알겠는데 딸들의 효심은 처음 듣는 예기인데요?" 여대생 정다운의 질문이다. "박제상에게는 딸 셋과 아들 하나가 있었다는데 큰딸의 이름이 아기(阿奇)이고 둘째딸 이 름이 아영(阿榮)이며 셋째딸 이름이 아경(阿慶)이고 막내가 아들로서 문량(文良)이다. 박 제상 부인은 내물왕의 아들로서 왜국에 억류되었던 미해(美海:미사흔)가 계림국으로 돌아 오므로 비로소 치술령 유배지에서 풀리기는 했으나 남편이 돌아오실 때까지는 집으로 가기 를 거부하니 딸들 또한 어머니를 따라 하산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치술령 산신의 계시를 받은 그녀는 외아들 문량(文良)과 유독 문량이가 잘 따르던 둘째딸 아영(阿榮)이만을 치술 령 산정 유배지로부터 하산하도록 설득하여 나졸들을 따라 금성으로 가게 했다 한다. 딸들은 여전히 산정에 남아 베틀에 앉아 베를 짜면서 어머니가 금성으로 갈 때까지 기다렸 다 한다. 그러다 결국 10월 3일 동해 목도에서 붉은 구름이 솟구치는 것을 보신 어머니가 그만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자 두 딸도 어머니를 따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켜 본 둘째딸 아영이는 동생 문량을 키우기 위해 어머니를 따라 같이 죽지 못하고 입술을 깨 물며 살아 나중에 미사흔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딸이 자라서 자비왕의 아내가 되니 박제상의 외손녀이다. 오늘 우리들은 충효의열의 정신이 얽혀있는 치술령 그 전설의 바위들을 답사하자는 것이 다.「망부석」과「베틀바위」와 그들이 살던 움막집터와 그들이 다니던 이끼긴 돌계단, 물 을 길러 먹었다는 참물래기의 참샘! 우리 오늘 망부석에 올라가서는 박제상이 화형당했다 는 일본 목도까지 보도록 합시다. 하긴 날씨가 좋아 잘 보일지 모르겠지만…." 한별은 한 손으로 치술령의「망부석」을 가리키며 신이 나서 말을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가 무섭게 정다운은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아,「망부석」!「망부석」이 있는 산이 저 산이구나. 우리 학교 역사선생님에게 많이 들 은 이야기입니다만 그「망부석」이란 바위가 저 산에 있나 봅니다. 한별 선생님! 그래요, 가면서「망부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 전설을 자세하게 알고 싶네요." "음, 좋아. 그럼 이따「망부석」에 올라가서 그 이야길 하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 사이 우리들은 상동저수지를 지나서 치술령 산 아래 큰덕골 참샘 개울물이 맑게 흐르는 시냇가에 이르렀다. 여기부터 우리 일행은 약 한 시간을 예정하고 개울을 따라 오르면서 가재를 잡기로 했다. 맑게 흐르는 개울물과 크고 작은 돌들은 모두 송사리․버들치․송어․피라미․가제 등등 민물고기들의 보금자리다. 한별이 긴 등산막대로 돌을 젖히면 돌 아래 물에서는 가재가 놀라 파닥이며 어데론가 숨으 려 하고 박꽃맘은 가재가 숨기 전에 얼른 잡아 정다운 언니가 들고 있는 주전자에 넣었다. 크지 않는 돌은 제각기 젖혀가며 잡았다. 물이 좀 깊은 곳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 떼가 유유히 무리를 지어 놀고 있었고 박꽃맘이 가지고 온 망(網)대를 넣어 잡았다. 물고기나 가제가 잡힐 때마다 호들갑을 떨며 헤헤 웃어대는 박꽃맘과 정다운의 모습, '어 엿차!' 하면서 바위를 젖혀가며 '저기, 저놈 잡아라!' 고함치는 한별 선생님. 정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짊어진 등산기구가 너무 무거워 어깨가 아프기도 하였지만 그 보다도 추운 겨울을 이기고 겨우 따뜻한 봄을 맞은 가재나 송사리 떼를 잡아먹는다는 그 자체가 싫었다. "전 바로 이 길을 타고 죽 올라가야겠어요. 먼저 중간쯤 올라가 쉴 테니 가재를 잡아 올라 오시소." "음, 그래 알았다. 여기서 이 거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쭉 올라 가거라. 그러다가 적당한 곳에서 쉬어라. 우리는 가재를 잡으며 올라 갈게."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하여 동식물(動植物) 모두를 음식물(飮食物)로 취할 수 있 게 했지만 성경 말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당시에는 식물(植物)만 먹고 살도록 하셨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낙원에서 추방당한 후 피를 가진 육체를 가지게 되자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노아시대부터 동식물 모두를 음식으로 취하게 축복하셨다. 사 람이 살아가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 자체가 비극이다.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 자기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이 될 수가 없고, 더 나아 가서 그것을 사랑으로 다스려야 할 만물의 영장이 사냥을 하면서 생명을 잡는 것을 즐긴다 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입장에서 보아도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생명을 죽인다는 그것 자체가 인간의 본성이 잔인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되어지기 때문 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만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면 사랑을 생활 에 몸소 실천하는 종교는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욱 도가적(道家的)이며 자연애호주의(自然 愛護主義) 범애주의(凡愛主義)이고 박애주의(博愛主義)이다. 불교의 생명 존중 차원의 채 식주의(菜食主義)는 하나님이 최초에 인간에게 준 그 말씀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창세기 1장 29-30절의 내용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채소(菜蔬)와 열매를, 동물에게 는 푸른 풀을 식물(食物)로 주었었다. 생명을 죽이면서까지 자기의 생명을 연장․ 연명하 도록 하시지는 않으셨다. 동물의 생명을 취하도록 허락한 것은 창세기 9장 2-3절의 노아 심판 이후 그 자녀에게 축복할 때 주어진 결과이다. 나는 가재나 고기를 잡으며 그들이 즐거워하는 그 모습을 마음 속에서 억지로 지우고 주변 의 산천초목을 보면서 자연을 즐기기로 했다. 산비탈에 멋없이 자라난 오리목 숲이 연두빛 오동통한 꽃가루를 치렁치렁 달고 바람에 흔들린다. 여기저기 바위 옆에서는 노란 산수유 꽃이 피었다가 흐드러지게 지고 있고, 음지에는 진달래가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 온산천을 붉게 물 들이고, 온갖 잡목 속에서도 유독 벚나무만이 곳곳 처처에서 화려하게 분수대의 물결처럼 하늘에다 둥글게 은빛 꽃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참나무나 오리목 등 잡목을 휘 감으며 황록빛 짙은 새순을 물고 뻗어가는 칡넝쿨이나 등나무 덩쿨 사이를 비집고 복숭화 ․살구꽃이 화사한 웃음을 펼치며 봄향기를 토한다. 이러한 봄꽃 숲을 가만히 드려다 보면 그것은 황홀난측(恍惚難測) 그 자체요, 요지경 속 그 자체다. 아니 창조본연의 신성함 그 자체다. 그 속에는 곧 자유와 평화가 있다. 풍요와 사랑이 있다. 그것은 기쁨이요 행복이 다. 그 속에 파묻힌 채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한 편의 시(詩) 속에 흠뻑 젖어든다. 나뿐만 은 아니다. 저 윙윙 거리며 꿀을 빠는 벌떼도 시심(詩心)에 젖어 있고, 봄을 만끽하며 조 금도 어색함 없이 교미를 즐기며 생명을 창조하는 새들의 애무도 낙원의 정경이다. 꽃닢 하나 바람 한 점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손흔드는 충만함이다. 이 모든 전경은 실로 미치지 아니할 수 없고 매혹되지 아니할 수 없는 아름다운 대자연의 운치이다. 나도 모르게 그 운 치에 매료되어 시 한 수를 읊었다. 오 봄이여 오! 봄이여 원한 서린 긴 겨울 바람 영글어 꿈이 된 희망은 화려한 꽃잎마다 스며들어 청초로웁고 소박한 미소로 흔들리면……. 인간 긴 역사는 너를 듣고 언어를 익혔고 너를 보고 그림을 그렸고 너를 따라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몇 억 년 다듬고 가꾸어도 학예(學藝)는 다함 없어 너로 인해 미치고 너에 잠겨 미치고 너를 찬양하다 또 미쳐 왔다. 눈으로 향기를 느낄 수 없었기에 인간은 우상을 그렸고 입으로 절경은 복사할 수 없었기에 수천 만의 언어를 가꾸었다. 그렇다 미친 자 미치었기에 시를 쓰고 노래 부르며 그림 그리고 춤추며 또 더 새로운 참을 찾으려 미치다 죽는다. 소탈함 너는 본디 청초로운 그 빛 너 싱그럽고 고운 그 생명의 고결한 참 맛 불협화음의 온갖 소리가 조화된 그 원(原)소리― 오묘함 여기 한 사나이가 그 아름다움 비길데 없어 미치고 만다 이 무슨 학예에의 비극이며 인류 역사의 치욕(恥辱)이란 말인가? 아! 봄이여 너에겐 신성한 사랑 꾸밈없는 미(美)로움 과장 없는 진실 불멸의 선 의로움이 있어 한 덩이 사향(麝香)되어 눈 코 입, 내 이 메마른 가슴 저… 깊은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너에 반해 미치게 하는구나 너에겐 만고불변의 종교와 높고 오묘한 학예와 순결과 진실 애정 희망이 함께 있어 투쟁을 싫어하는 인간 더이상의 얽매임 채찍질의 해방을 위해 그 이상의 영화와 행복을 사양한 청렴한 자들이 모두 모두 널 찾아 왔었다. 봄이여! 당신이 만든 종교는 위대하외다 다함없이 누구든지 용납해 주시고 크고 적게 맺힌 한 풀어 주시고 풍요로운 희망을 우리에게 주시니…… 오! 봄이여! 당신의 학예는 위대하외다 땀과 눈물 피나는 노력과 기도의 제단도 바라지 않고 모든 그 상처 번민(煩悶) 오열(嗚咽) 서러움을 씻어 주시고 깊고 높은 사랑을 저에게 주시나니…… 본 그대로 좋아서 좋아해도 실망 주지 않았었고 느낀 그대로 진실을 믿어도 낙심(落心)할 리 없었다 생각대로 결단하여도 잘못된 일 없으며 오해하지 않았다. 그런 너에게 어떤 잘못과 모순을 찾으며 그렇게 너를 믿는 자에게 사악(邪惡)이 있으리오 그렇다 네가 자라 여름 오고 익어 가을이 와도 너 겉옷이 수없이 바뀌고 너 뼈대가 날마다 달라져도 네 속을 흐르는 춘혼(春魂)의 높은 뜻과 오랜 정성의 기도는 한 겨울 눈 속에서도 만고불변하리니…… 오 내 어찌 존경하는 당신 곁을 떠날 수 있으리오 미친 사나이는 여기 한 조각 거짓된 시를 쓰고는 못내 아쉬워 미쳐 또 운다. 대자연의 오묘함이여! 내 무엇으로 너를 알랴! 나는 배낭을 짊어진 체 혼자서 산길을 타고 올라가며 대자연이 창출한 봄의 신비로운 아름 다움을 만끽하였다. 일행이 가재를 잡아 올 때까지 이와 같이 진달래 꽃숲이나 산벚꽃 그 늘이나 살구꽃 숲에 묻혀 기다리다가 저들이 이곳까지 가재를 잡아 올라오면 또 일어나 걸 었다. 이렇게 하며 자연의 품속을 찾아가서는 누워도 보고 앉아도 보면서 저들을 기다렸 다. 두어 시간 이상 그렇게 기다리며 또 올라가고 올라가고 했더니 가재를 더 잡을 수 없 게 되자 내 뒤를 따라 길로 올라왔다. "흰빛곰! 내가 오늘 너를 짐꾼으로 대리고 온 것 같군. 미안해. 여기서부터 저 참샘터까지 는 내가 메고 갈게." "별 말씀 다 하십니다. 천마봉 산에서 나무 한 짐 짊어지고서도 어른들을 따라 10리가 넘 는 우리집까지 갔는데…… 번거롭게 하지 마시고 오르막엔 좀 밀어 주시고, 신라의 충신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나 해 주시소?" "망부석을 이야기하려면 신라 초기의 역사를 좀 알아야 하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혹은 박제상 전기 등에 실린 전설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고 시간대의 차이나 왕대의 차이까지 있단 말이야. 실성왕(實聖王)대라고도 하고 눌지왕(訥祗王)대라고도 하는데 그 사실을 지 금으로는 확실하게 증명하기가 힘들지, 우선 제상의 성씨부터 두 가지야. 삼국유사(三國遺 事)에는 김제상(金堤上)이라 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박제상(朴堤上)이라 했는데 삼 국사기쪽의 박씨로 믿고 있는 이가 많은 것 같애. 박제상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신라(新 羅) 초기의 역사는 객관성이 아주 희박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기록이 많아, 고구려나 가락국 등이 신라보다 늦게 일어난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최근 고고(考古)학계에서 발굴한 고분 등을 분석해 보면 가락국이 삼남 각지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강대한 나라였고, 왜국 이라는 말이 바로 가야국을 지칭하고 있다는 일부 사학자도 있어, 멀지 않는 장래에 이 부 분의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게 될 거야―." "저 또한 듣기로는 지금 국사찾기운동 본부에서는 이병도 사학자가 만든 국사교과서를 새 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열렬하게 펼치고 있다 하지요. 고 안호상․박창암․임승국 씨 등이『자유』지라는 월간지를 통하여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는데 경주에는 김세환씨가 그 후원회의 회원이라 합디다." "그런 뜻 있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이병도! 그분이 대단한 거물인데다 그분의 제자들이 각 부서의 중요한 요직에 앉아 있어서 역사 개정이 어려운 것 같아. 말하자면 스승의 주장 과 논리를 어떻게 제자가 뒤집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있다 하니……." "그렇다면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는 묵인할 것 같군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잘못된 책이라 주장하는 가장 그 한 가지 예를 보면, 고구려․ 백 제․ 신라 중에 신라가 가장 먼저 있었고 가장 먼저 국가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며 대국(大 國: 中國)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삼국사 기나 삼국유사 스스로가 잘 증명하고 있어." "삼국유사에 그런 것을 증명하는 데가 있나요?" 정다운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연대표를 죽 읽어보면 자연히 알게 돼." 한별의 대답이다. "그 연대표에 무엇이라 쓰여졌는 데요." 박꽃맘이 물었다. "고구려나 가락국은 처음 출발할 때부터 이미 중국식 왕명(王名)을 지니고 출발한 나라로 문물이 대단한 수준에 있었다 해." "가야의 고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지요? 신라 이전부터 김해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여 삼남에 6가야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철기문화가 발달하여 그때부터 철기시대를 가 장 먼저 열고 해상으로 수출까지 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고 하더군요?" 나는 한별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그런 것도 있지만 신라는 그때 아직 국호도 정하지 못하고 나라 형태를 갖추지 못 한 부족으로 사로(斯盧)․서벌(徐伐)․계림(鷄林)․서라벌(徐羅伐) 등으로 칭하다가 혁거 세를 족장으로 정한 것 같애. 그때도 왕이라는 명칭을 몰라 사용하지 않고 거서간(居西干) 이니 차차웅(次次雄)이니 이사금(尼師今)이니 하고 불렀지." "한별 선생님! 그것은 왕이라는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부른 것으로 저는 알았는데요." "물론 따지면 그렇지만 임금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사용한 것인데 그때까지 신라에서는 왕이라는 칭호를 몰랐다는 것이야. 흰빛곰은 독학을 하는데 신라시대 왕 이름을 다 외울 수 있어?" "저 대충은 압니다만……." "그럼 시조왕부터 가락국과 합병할 그때까지 어떻게 불렀는지 한 번 외어 보지." "그쯤은 안 알겠습니까? 제1대 박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제2대 박남해(朴南海) 차차웅(次次雄)…… 19대 김눌지(金訥祗) 마립간, 20대 김자비(金慈悲) 마립간, 21대 김비 처(金毗處) 마립간, 22대 김지정(金智訂) 마립간 이지요." 하고 나는 일사천리로 죽 외웠다. "야! 정말 대단하군. 그렇지 그렇게 불리던 족장의 명칭을 23대에 와서부터는 중국식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어. 왜 그런지 알아?" "글쎄요……." "여대생이 대답 한 번 해보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껏 왜 그렇게 불렀었는지 사학자들이 그 이유를 다루지 않고 있지만 내 개인적인 견 해로 보아서는 거의 틀림없이 23대 법흥왕대에 와서 서라벌(徐羅伐)이 가락국(駕洛國)을 합방(合邦)병합(倂合)한 후 처음으로 왕(王)이라는 칭호를 지닐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가 락국의 정치․ 문화를 흡수하여 그때 비로소 중국식 왕(王)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나 는 판단해. 그리고 신라(新羅)라는 국호에 대해서 흰빛곰은 어떻게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생각해?" "서라벌․ 새벌․ 서벌․ 신라 등으로 말이 변혁되어 온 것 아닐까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 그러나 새로움을 펼친다는 뜻은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뜻을 함 축하고 있는데 하나의 나라 형태를 갖춘 왕이 새로운(新) 가락국(伽羅國)을 건설한다는 뜻 을 함축한 국명을 신라(新羅)라고 명명(命名)했다고 나는 믿어. 그리고 가라국(伽羅國)이 란 본래 석가(釋迦)의 나라를 펼친다는 의미로 만든 것인데 신라가 가야(伽倻)를 병합 한 후 그 의미를 흐리게 했다고 생각이 돼, 조선조에 와서 금해(金海)를 김해로, 금(金)을 김 으로 고치듯 말이다." "그것은 왜 그렇게 고쳤어요." 박꽃맘의 질문이다.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보면 금(金)이 항상 목(木)을 이기기 때문에 이씨가 왕권을 유지하 기 위해서는 금씨(金氏)를 그냥 두면 안된다는 음양설(陰陽說)에 기초를 둔 것이라 해." "정말 그런가요?" "당시엔 그렇다고 믿은 것 같애. 아무튼 신라는 가야를 흡수하므로 신문화(新文化)를 얻었 어. 역사책에 보면 우리나라에는 불교전래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들어 왔고, 백제는 침 류왕때, 신라는 법흥왕때 유입된 것으로 되어 있어. 그렇지만 가야(伽倻)는 이미 시조(始 祖)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인도의 공주인 허황옥을 부인으로 맞을 때 그녀의 오라비가 승 (僧)이었으며 수로왕의 아들들도 승이 되었어. 그러니 고구려보다 신라가 먼저 가야의 불 교가 전래되었다고 나는 보아. 그리고 법흥왕이 최초로 시호인 법흥이라는 명칭을 가진 것 도 가야의 문화를 흡수 접목한 결과야…… 그러다 진흥․ 진지․ 진평왕대를 지나서 선덕 ․ 진덕 두 여왕을 거처 태종무열왕 김춘추시대에 김유신이라는 천하 명장이 나와서 삼국 을 통일하므로 비로소 하나의 나라 형태를 갖추고 탄탄대로를 달리는 통일 국가가 되었지. 그 이전에는 아직 국가의 틀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었고 차후 신라라고 칭하게 되는 계 림국(鷄林國)은 빈약하기 이를데 없는 약소국이었어. 이웃 강력한 부족국가들로부터 침약 과 약탈과 간섭을 받으며 지냈지. 이 치술령의「망부석」전설은 신라가 가야와 합병하기 오래 전의의 이야기지. 그러니 17대에서부터 19대 사이에 있었던 설화(說話)인 것이야… …" 여기까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올라오다 보니 우리는 벌써 박제상 부인이 살았다는 움막 집터가 보이는 산등성이 고갯마루까지 올라와 있었다. 능선 바로 아래에는 88도로 경사인 가파른 길이 있고 그 길옆 두길 안 되는 높이의 바위 틈에서 촐촐촐 차디찬 물이 새어나오 는 참샘이 보였다. 나는 어깨에 짊어진 짐을 어써 벗어버리고 싶어 있는 힘을 다하여 손에 잡히는 잡목을 힘 껏 당기며 씩씩대며 올라갔다. 이곳이 박제상 부인이 영문도 모른 채 유배되어 살면서 산 마루 움막집에서 조석으로 물을 길러 밥을 지어 먹었다는 전설 속의 샘, 그 참샘이다. "정말로! 천지에 이럴 수도 있나? 이렇게 높은 산위 바위 틈에서 이렇게 맑고 찬 샘물이 솟아오르다니 하늘의 조화가 가히 불가지(不可知)라." 나는 경탄 했다. 그 누가 상상해도 생각이 미칠 수 없는 것은 이 높은 산등성이에서 어떻 게 바위 틈에서 퐁퐁 물이 솟아오르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요 수수께끼다. 나는 곧 짊어지 고 온 배낭을 샘터 빈땅에 내린 후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는 표주박으로 한 바가지 물 을 떠서 꿀꺽꿀꺽 마셨다. 이곳에 올라왔던 고마운 그 누군가가 샘터 바위의 잡목 위에 표 주박을 걸어둔 것이 여간 생관스럽지 않았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진맥진해서 잡목 을 잡아당기면서 올라오고 있는 세 사람을 내려다보고 외쳤다. "한별 선생님! 제가 먼저 와서 천하제일 치술령 약수를 소인이 이렇게 먼저 마셨나이다! 야아호 야호!" 그리고나서 내가 항시 즐겨 읊는〈창공〉이라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당시 중앙강의록 월간잡지인『향상』지 문예작품에 최우수작으로 당선된 민선희 독학생의 시다. 흑백으로 사진이 찍혀 실린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그 여학생의 시가 내가 투고한 나의 가작 시보다 월등하게 마음속 깊이 와 닿는 작품이라 이내 외우게 되었다. 내 가 만약 앞으로 결혼하여 딸을 낳으면 선희라는 이름을 지어 이 시를 쓴 아가씨를 기억하 리라고 다짐까지 했다. 창공 무한대의 푸른 창공을 향하여 한 가닥 사연을 날려보는 아! 그 무슨 희구인가 향수어린 가슴에 날아드는 푸르름이여 수많은 인간들의 푸른 사연이 물들어 변해버린 창공이여 무한한 너 품에 뛰어들어 숫한 사연을 토하는 무리들에게 너 무엇을 안겨 주었던가 인간의 무상이 가득히 서리고 동경의 꿈이 깃발되어 펄럭이는데 너 무엇으로 이들의 가슴을 채워 주었던가 향학(向學)에의 몸부림이 꿈이 되어 떠돌고 가난이 토한 한숨은 푸른 창공에 이름없이 사라져 허무만이 감도는데 네 무엇으로 이들의 아픔을 달래어 왔었던가 아아, 푸르른 창공이여 내 이 뼈아픈 가난한 고독의 서러움은 푸른 창공을 불태우는 원한의 핏빛 노을이라서 벌겋게 벌겋게 충혈되어 네 가슴에 저렇게 번져가는데 너는 무슨 사념으로 입을 다문 채 말이 없구나 광대한 너 품에 숱한 사연을 안고 뼈저린 슬픔에 너 흘린 눈물이건만 이 대지 위엔 황금 물결 이루어 놓아 고요히 숨을 쉬는 평화 속에 희망의 멜로디 푸른 창공에 번지는도다 아아, 푸르른 창공이여 너 가슴에 흐르는 푸르름은 내 품을 흐르는 눈물이란다 너 이제 내 이 슬픈 가슴의 대지 위에 희망의 꽃을 피워 눈물일랑 거두어 주소서 내가 시를 읊으며 지르는 고함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조금 뒤쳐져 헉헉거리며 도착한 두 여성은 물에 젖은 홍초(紅草)처럼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나의 손에 쥐어 있는 표 주박을 받아 물을 떠서 마시고는 피곤한 듯 앞에 있는 작은 바위에 앉으며 모자를 벗는다. 한별 선생님은 나중에 물을 마신 후 내가 짊어지고 와서 잔디 위에 내려놓은 배낭 속의 등 산 도구와 쌀․ 고추장․ 간장․ 파․ 마늘 등을 끄집어내어 박꽃맘과 정다운에게 주면서 말했다. "자, 저기 옛날 신라시대 박제상 부인이 만들어 놓은 저 부엌에다 이 냄비를 걸고 불을 지 피어 밥을 하고, 여기 이 버너에는 반찬을 끓여라. 흰빛곰은 부근에 가서 나무를 주워 와. 여기는 물가이기 때문에 불이 날 염려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의하고." "저게 신라시대 만든 부엌이에요." "허허! 참 그 아가씨 순진하기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우리처럼 이렇게 등산온 사람 들이 밥을 지어먹기 위해서 만든 것이겠지." "전 또 정말이라고, 피이!" 정다운과 박꽃맘은 즐거운 듯 만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들은 양념과 함께 뒷부분을 잘라 검은 내장을 떼버린 가재와, 배를 따고 창자를 끄집 어낸 민물고기를 한데 버물려서 냄비에 넣고 버너에 불을 피운 후 그 위에 얹었다. 부엌에 는 양철솥을 걸고 불을 지피어 밥이 부글부글 끓을 때까지 때었다. 이렇게 하여 만든 가재 찌개에 꼬실꼬실하게 익은 쌀밥을 지어 작은 밥공기로 찌개와 밥을 번갈아 들면서 배가 부 르도록 맛있게 먹었다. 한별 선생님은 카메라를 끄집어내어 밥을 먹는 우리들의 모습을 담았다. 오후 2시가 다 되어서 우리는 다시 물을 실컷 더 마시고는 일어났다. 내가 다시 배낭을 지 고서 한 마디 했다. "사주팔자에 이놈은 내가 짊어져야 한다고 되어 있으니 또 내가 짊어져야지." "내가 지고 갈까?" "허허, 사제지간에 스승께 짐지우는 제자가 어디 있던가요. 점심 먹기 전보다는 반에 반 짐도 안되는구만요. 저기 저 비탈길 오를 때 한별 선생님께서 뒤나 좀 밀어 줘요." 정다운 여대생은 나를 쳐다보고는 조금은 미안하다는 듯 생긋 웃으며 말한다. "나중 우리집에 한 번 초대하여 오늘 입은 은혜를 갚아 드리죠! 어쩝니까?" "백호는 아마 정다운 언니집에 가면 눈이 어리쳐 정신을 못 차릴끼다. 변소에 가서 이불 펴고 아마 잘라 칼끼라?" "뭐? 못할 말이 없구나! 누나라고 동생을 놀리나? 정말 내가 초대를 받는다면 '아버님 이 사위에게도 집 한 채 마련해 주소! 다음에 제가 벌어서 갚아 드리리다.' 하고는 정다운 씨 의 방에 들어가 이불 펴고 침대에 눕지." "…………." 정다운은 이 소리에 무안을 당했는지 얼굴이 샛빨갛게 변하였다. 넬름 혀를 내밀면서 자기 의 눈치를 살피는 나의 눈길을 피한다. 이윽고 치술령 큰덕골 참샘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박제상 부인이 은거하였다는 움막 집터를 살펴보았다. 그냥 해묵어 썩은 잡초와 떡갈나무 숲과 불에 타버린 고목(枯木) 둥치가 여기 저기서 시커멓게 서 있을 뿐이었다. 한별이 큰 소리로 어서 이리 와 보라고 한다. 나는 무슨 볼거리라도 있나 하고 그가 가리 키는 장소로 몰려 가보니 그 옛적 누구인가가 만들어 놓은 돌계단 길이었다. "이 돌계단 길은 신라시대 박제상 부인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일 밟고 다닌 길 이고, 저기 저 위에 바로 보이는 정상 밑의 저 바위가「베틀바위」야. 이 베틀바위 말고도 박제상의 세 딸을 상징하는「세 효녀아기바위」가 있지. 그 높이가 각각 3-4m 내외의 바위 셋이 있는데, 바위는 은을암을 바라보고 있기에 딸 셋을 상징한다 해. 실제는 두 딸의 혼 이 새가 되어 은을암에 갔으므로 그 바위를 혹은「아기바위」「처녀공주바위」라고도 부르 지. 그런데 이 바위를『울산읍지』에는「망부석」이라 기록하고 있다고 해. 왜냐하면 그 책이 왜정시절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전설의 내용은 크게 잘못 기록된 것이 야." "한별 선생님 우리 저「베틀바위」에도 올라가 보고 경남 두동 만화리쪽에 있다는 그「아 기바위」에도 한 번 올라가 보아요." 정다운의 말이다. "그래, 우리 아버지도 말씀하셨어.「망부석」은 분명 녹동 산 161번지에 있고 161-1번지는 치술령 정상에서 동편인 외동면쪽이고 또 그곳에 서서 동해를 바라보아야 대마도가 보인다 고 하시던데요." 박꽃맘도 거들었다. "이상하게 경주시에서는「망부석」을 왜 유적이나 사적지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지 그것 이 궁금해요. 거기에다 녹동 산 161번지 내에「망부석」이 있음.〈유적지 몇 호〉해 두면 될 걸." 내가 물었다. 그러자 한별 선생님의 말을 받아 "아직 경주시에는 문화유적을 담당하시는 분들 중에「망부석」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분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애. 그까짓 바위 하나 가지고 뭐 그러냐? 그렇잖아도 경주에 는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많은 문화재(文化財)가 있으니까 그냥 버린 것이지 뭐? 그것을 문화유적으로 지정해서 과연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며 추후 시정(市政)에 도움이 될 수 있나를 타진했다가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으니 포기한 것이겠지 뭐?" 나는 곧장 달려가「베틀바위」에 올라갔다. 경주쪽을 바라보았다. 경주 시가지는 잘 보이지 않았고 저 멀리 변두리 지역만 아득하게 보였다. 우리는 차례로「베틀바위」에서 풀쩍 뛰어내려 잡목이 우거진 좁은 오솔길을 타고 올라 이 윽고 치술령 정상에 올랐다. 사방 천지가 다 보였다. 한별 선생님은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설명을 하였다. "저기 저 산은 대구 팔공산, 저 산은 청도 운문산, 저 산은 석남사가 있는 가지산, 저 산 은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 저쪽 저 산은 울산 무룡산, 저 산은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 저 먼 곳 저 산은 청도 주왕산 저기 저 산은 건천 단석산……." 서쪽과 북쪽은 산 넘어 또 산, 산과 산으로 이어진 산맥과 산맥이 수없이 뻗어 있으며, 그 사이 사이에 들이 있고 도로가 있고 마을이 있고 저수지가 있다. 남쪽은 들 건너 산너머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동쪽은 잉크빛 파아란 바다가 수평선과 마주하고 있다. 한별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남남동쪽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청명하기 때문에 목도(木島) 즉 요즈음 말하는 일본의 대마도(對馬島)가 보일 것이다. 자 저쪽을 봐. 아, 저기 있네. 저기 보이네. 저기 흰 배가 보이는 그 끝 수 평선을 봐라. 저기 거무잡잡하게 그림같은 까마득한 산이 보이지. 저 곳이 바로 대마도야. 박제상이 화형(火刑) 당하여 죽은 곳이 저곳이지. 저기서 붉은 구름이 솟아 올라오는 것을 보고 박제상 부인이 실신하여 몸이 굳어 바위가 되었었다 하지 않나!" "아, 예 예. 저기 보이네요. 저곳이 바로 목도인 대마도요?" "그렇다니까……. 오늘은 우리가 행운을 만났어. 날씨가 조금이라도 흐리거나 바람이 불면 파도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는데 오늘은 보이네. 이곳에 올라와서 대마도를 보고 가는 사 람은 행운을 만났다고 그러지." "그럼 빨리「망부석」으로 가요. 선생님!" 정다운의 독촉이다. "여기서 사진 한 장 찍어야지, 흰빛곰! 짊어진 배낭은 저기 두어! 누가 가지고 가지는 않 을 테니. 저기 치술령 정상 표지판 있지. 그 앞에 서 봐? 흰빛곰 너는 가운데 서고 미쓰 박은 동쪽에 미쓰장은 서쪽에 한쪽 다리를 앞으로 구부린 자세로 앉아 봐요……. 음 됐어. 자! 하나, 둘, 셋!" 우리는 정상에서 두어 판 사진을 찍고 난 후 동남쪽으로 난 작은 숲길을 걸어서 약 10m쯤 아래로 내려가니 골 바닥에서 치솟은 바위가 우리가 선 위치까지 산을 업은 채로 있었다. 우리는 바위 위에 쉽게 올라갈 수가 있었으나 그 바위 위에 앉아서 골 바닥을 바라보니 얼 마나 높은지 까마득하여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바위가 정상과 연결된 부근에는 사람 한 명이 반드시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길이로 직사각형으로 돌이 널처럼 패여 있었고 그 자리 에는 해묵은 잡초와 낙엽이 꽉 쌓여 있었다. 그 자리를 손으로 파 보이며 한별 선생님이 설명을 했다. "전설에 의하면 박제상 부인이 이 바위 위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실신하여 혹은 떨어져 죽 었는데. 그 이후 7년간 하늘이 흐리고 건(乾)장마가 들었다고 해. 그것은 남편과 생이별을 당한 것만도 억울한데, 왕의 아우 미해를 구하기 위하여 간 남편을 두고 나라에서 왜왕에 게 항복하였다 하여 가솔을 치술령 산정에다 유배시켜 놓은 거야. 결국 미해는 돌아왔는데 사랑하는 남편은 심한 형벌을 받다가 불에 타 죽고 말았다는 것을 알고는 그 억울함과 원 통함을 풀 길이 없어 투신하여 죽었지. 그 원혼이 하늘에 닿아 하늘이 햇빛을 주지 않는다 하여 그 아들 문량과 그의 누나 아영과 아영의 남편 미해가 눌지왕을 설득하여 망덕사 부 근에 있던 유골을 여기에다 이장을 하였어. 그 후부터 이 바위 이름을 「망부석」이라 하 니 긴 역사가 흐르는 동안 말이 변해 전설이 되고 그 전설은 다시 부인의 몸이 굳어 바위 가 되었다는 것으로 화했어. 그리고 전하는 말에 어느 용한 풍수(風水)가 이르기를 이곳에 다 죽은 사람을 묻으면 송장이 용이 되어 하늘에 올라가 자손 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데 사방 7백 리에 7년간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대환란(患亂)이 온다고 하는 속 설이 있어.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지. 이것은 실화인데 날씨가 3년 이상 비가 오지 않고 가물어 온 산천초목이 타 들어갈 때, 지금도 보면 알겠지만 정상 둘레에 군데 군데 파 헤 쳐진 곳이 있지. 왜 그런지 궁금하지. 바로 분묘를 판 자국이야. 가뭄이 계속되면 나이 많 으신 어른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치술령 정상 어디엔가 남모르게 무덤을 써서 가문다 하여, 치술령 산하 모든 마을의 장정들이 동원되어 산으로 올라가지. 기우제를 지 내면서 정상 둘레 여기 저기를 샅샅이 뒤지며 몰래 쓴 무덤에서 해골을 끄집어 내었는데 그런 해골이 꼭 있었다 해. 해골을 끄집어내자마자 사방에서 비구름이 일어나 금시 소나기 가 되어 쏟아지는데 올라왔던 장정들이 도랑을 건너가기 어려울 정도로 갑자기 많은 비가 왔다고 그래. 이것은 사실이야. 그때 석계에 사셨던 분은 이때의 경험을 아직도 신비스럽 게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도 이 바위가「망부석」이 아니고 울산지역에 있는 정상 서남쪽 약 300m 아래 있는「세 효녀아기바위」를「망부석」이라고 우기며 문화유적으로 지정해 놓 고 있다 하니 기가 막히지. 물론 박제상이 태수(太守)로 근무했던 곳이 양산이고 그곳이 영해박씨 후손이 밀집해 있고, 치술신모를 모시는 사당이 울산 두동지역에 있으니 욕심을 낼만도 하지. 그렇지만 전혀 근거도 없는 엉터리 바위를 동해가 일부 보인다 하여「망부석 」이라 한 것은 후손들에게는 역사 앞에 죄를 짓게 되고 가깝게는 석계나 녹동의 지역민들 을 우롱하는 짓이지." 한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웃었다. "답답해 할 것이 무어 있어요. 몇 천 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 주민들이 있는데… …. 하기야 외각지역에서 온 분들이「망부석」 답사하려다 가짜 망부석인 베틀바위를 보고 는「망부석」이라 믿고 가는 오류를 범하긴 해도……." "내가 흰빛곰 너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은 너만이라도 이 사실을 똑똑하게 알고 산증인이 되어 전체 경주시민에게 알려 달라는 것이야.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득이 없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든." "한별 선생님. 전 이「망부석」을 저가 태어난 큰집 가운데방에서 문만 열면 눈앞에 보여 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보고 싶어 문을 열면 이 치술령과「망부석」이 언제나 먼저 눈앞에 와 닿지요. 우리집에서 보이는 이 치술령은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누운 것 같 아요. 꼭 돌아가신 어머니가 양팔을 벌리며 나를 오라고 부르는 것 같고, 이「망부석」은 어머니의 오른쪽 팔 안에 있는 유방으로 보이대요. 사실이 이런데도 어찌「망부석」이 다 른 곳으로 달아 날 수가 있을까요? 한 가정 안에서 충효열(忠孝烈)을 동시에 한 대(代)가 실천한 예는 동서고금 어느 나라에서도 없는 일이지요. 남편의 충(忠), 딸들의 효(孝), 아 내의 열(烈)은 곧 우리 한민족의 얼이요 사상이며 정신적인 지주요 뼈대입니다. 박제상의 가정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충효열의 표상이 아닐 수 없지요." "그렇고 말구요. 오늘날에도 민주화를 위해 쓰러져간 학생들이나 광주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들도 그런 충신 애국자가 아니겠어요? 한별 선생님." 정다운의 질문이다. "그렇지! 자세히 보면, 지난 현대사에 이승만 독재체재를 무너뜨린 4.19혁명에 이은 5.16 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 군부 세력도 역시……. 우리의 근대사는 과거의 조선왕조 500년 역사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 나라 백성들은 이스라엘 국민 이상으로 머리가 뛰어 났는데도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결핍되어 있어. 사회도덕, 정치도덕, 윤리도덕 모두가 그래. 법치국가로서 법이 필요 없어. 기본 양심이 없어! 약자에게만 적용 되는 법 같아! 조지훈 선생이 〈지조론〉에서 말한 지조있는 정치인이 보기 힘들어! 또 함 석헌 선생의 말씀 마따나 이 나라에는 훌륭한 문화가 도입되면 그 즉시 가장 흉축한 몰골 로 전락해 버린다고 한 것이 생각나. 앞으로 두고 보아야지. 선량한 국민들은 언제나 훌륭 한 지도자를 갈망하고 그 지도자를 모시고 한 번 잘 살아보려고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이나 권력 가진 자들이 이 나라를 망치고 있어. 저희들끼리 물고 뜯고 야단이니! 입(口) 가지고? 손바닥만한 이 땅이 미소(美蘇)의 발굽에 밟혀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데… ….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나랏일은 뒷전에 두고 권력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정신을 차리 지 못하니……. 군부가 세력을 장악하게 되고 국방을 국시의 제1로 해야 하는 우리나라 같 은 경우 진정한 민주화는 심히 힘들어! 아마 앞으로 남북이 군사력으로 대치된 이 상황에 서는 군부세력이 계속 권력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야. 권력 유지에 불리하면 비상계엄령 을 선포하고 포고령을 내리면서 말이다. 지난 날을 봐. 4.19혁명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민 주화세력은 3년도 지탱하지 못한 채 군사독재에 짓밟히고 있지 않았나……. 4.19혁명이나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것도 정치인의 장난인지 민중의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충효열이 우 리 민족의 얼이라면 이 세 가지가 우리 국민의 정서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은 그 색깔을 분간하기가 심히 곤란해. 이 귀중하고 소중한 한민족의 얼이 몇몇 정치인의 정권 연장이나 권력유지에 무참하게 이용당하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 기가 막힐 일 아닌가? 남과 북 이 갈라진 것 누구 잘못인가? 구한말 조정의 잘못된 정치 탓 아닌가? 36년 동안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갖은 굴욕 끝에 해방을 했는데, 도산 선생을 죽이고 김구 선생을 죽이고 미 국에게 온갖 아부를 하여 남쪽만이라도 자유선거를 하자 해서 정권을 잡아 요직을 차지한 인사들이 누구였던가? 일본에게 아부하고 아첨하며 권력을 누려온 그들이 아니었던가? 일 제 36년 동안 잘먹고 잘 입으며 권력을 행사한 자들이 누구던가? 당시 조선총독부 앞잡이 노릇했던 자들이 아니던가? 작은 마을의 반장․ 이장에서부터 면장․ 지서장은 물론 도지 사와 국회의원들……. 잘은 모르지만 적지 않는 무리들이 그때 치부했던 돈과 인맥과 친분 으로 지금도 그런 자리를 확보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 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불학무식한 민초(民草) 밖에 없으니 그렇게 했겠지요." "흰빛곰, 생각해 봐! 아무리 그렇지만 김대중씨가 어찌해서 간첩이란 말인가? 전라도에서 태어났다고 간첩인가?" "그것은 우리 민초로서는 알 길이 없지요." "그렇지 않아. 남북이 대치해 있는 상황에서 공산주의가 우리의 적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순수한 국민들을 우롱하는 것이야. 안다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아는데……. 오늘날 박정권 이 아무리 정치를 잘 했다 해도, 우리가 경제개발을 이룩해 선진국에 진입하도록 했다 해 도 이러한 공과는 일거에 무너질 수밖에 없어? 왠지 알아? 부정 부패와 소수 재벌이 결탁 해 권력 야합을 위해 만들어진 경제발전이니까? 박대통령 시절 그의 연설에〈배때지가 불 러야 민주주의도 한다〉라는 말이 있어. 미국이 처음부터 배때지가 불러 민주주의를 했남? 그들은 청교도 정신으로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건전한 국민정신을 함양한 터전 위 에 그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서 생산을 하고 그 생산한 이윤을 청교도 정신으로 국 가와 사회에 투자하면서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고 개인의 인격을 가꾸고 가정을 이루고 사 회를 형성하고 국가를 경영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아." "저는 달리 보아요. 미국은 200년 짧은 역사에 처음부터 인성교육을 실시한 나라로서 그 마음 바탕이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국민들은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청교도정신의 실천에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인구에 비해 국토가 넓고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비옥하여 의식주 해결을 위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지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우선 국토가 좁고 지하자원이 부족하고 인구는 많은데다 긴 역사 동안 좁은 반도 안에서 살면서 외부로부터 침략을 막기 위한 국방비의 지출이 막대한 데다 가 내부로부터 서로간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요. 그러다 보니 도덕성이 완전 소멸되고 없 으며 최후로 <어떻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나>하는 것을 나름대로 터득한 것 같아요. 약 한 자는 강한 자에게 아부해야 하고 강한 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치인과 재벌과의 야합하지요. 선거때마다 소위 지역 유지와 야합하고 권력판도가 바뀔 때마다 칠 면조처럼 옷을 갈아 입고 당적을 바꾸는 철새정치인……. 이 모두가 저가 보기에는 이 나 라 정치 풍토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한 20―30년 동안 정말 훌륭한 애국자가 나와서……. 히틀러 같은 독재자라도 진정 이 나라 장래를 염려하는 애국자라면 그런 분이 나와서 정치 적 독재를 좀 하더라도 인성교육을 단계적으로 새로 시켜 국민정서를 바로잡은 후에 민주 주의를 했으면 해요. 저 개인적으로는 누가 뭐라 해도 저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 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안아요." "야, 이 사람아! 정신차려! 우리가 어찌 작금의 중앙정보부에서나 국보위에서 발표하는 사 실을 어떻게 알고 믿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시 10월유신과 비상계엄령. 이것은 정권 연장의 엄청난 술책이고, 새마을운동 이것도 유신독재 하에서 외치는 허울좋 은 권력 유지의 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아는데!?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 았네…….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 이 얼마나 좋아. 나도 그렇게 그 운동에 참여하였지. 그러나 그것이 4.19혁명 속에서 이루어져야할 구호요 외침 이며 노래이지. 또 그렇게 되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의 꽃이 될 터인데, 어찌하여 군부 독 재 체제에서 비상계엄령 속에서 새마을운동․새마음운동이 가능하며 잘 살 수가 있단 말인 가? 특정인들 끼리, 끼리끼리 관계를 맺고 국가권력으로 국민의 세금을 투자하고 또 권력 야합과 부정부패 속에 이루어진 경제는 참된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실현될 때 하루 아침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내가 오늘 너를 데리고 이곳 치술령 등산을 온 것도 흰빛곰 에게 충효의열을 바로 알고 박제상 가족 3대(三代)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그 얼과 정신을 바로 인식시켜 주기 위해서야." "알겠어요." 나는 한별 선생님의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한별 선생님은 계속 하여 박제상이 일본에서 미해를 구출해 온 자세한 이야기와 그 부인이 치술령 정상에서 살 아오면서 남편을 그리워했던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두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치술령 정상으로 올라가서 서쪽 등성이를 타 고 내려가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세 효녀아기바위」(곧 지금의 가짜「망부석」)를 답사하 고 정상으로 되돌아오니 어느덧 태양은 서편 운문산 남쪽 자락으로 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넘어가고 있었다. 해를 바라보면서 이때 정다운 아가씨가 쌩끗 웃으며 의미있는 한 마디를 불쑥했다. "흰빛곰은 박제상같은 분이 되세요! 나는 그 부인처럼「망부석」이 되어 기다릴께." 나는 그 말의 깊은 뜻을 알아들었지만 정작 입으로는 나도 모르게 다른 말이 튀어 나왔다. "뭐라고? 나는 박제상이 되어도 미쓰 정이「망부석」이 되면 큰일나지요! 허허허."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뭐? 한별 선생님 한 번 봐!" 박화심이가 나를 보면서 웃었다. 그녀는 홍초였다. 그러자 한별 선생님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변명을 하였다. "보자! 나이가 흰빛곰보다 미쓰 정이 더 먹었지? 알 수 없지. 우리집 순홍이 엄마는 나보 다 세 살이나 더 먹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외동아들이라고 군에 입대하기 전 손 주를 보아야 한다고 열일곱 살 때 21세 처녀와 결혼을 하게 했거든? 벌써 첫아이 순홍이 나이가 열여섯 살이다." "의누나라면 모르지만 그런 농담은 마십시오." 나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말하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벌써 날이 저무네요. 높은 산이라 기온이 급강하할 수도 있고 하니 지금부터 내려가 도 늦어요. 길이 험한데 위험해요. 선생님 서둘러 갑시다."
제4부 치술령 관련 시모음
차돌밭의 수정꽃
치술령 하늘에
충효열 늘 푸른 바람 사시(四時) 불어
차돌(白石 石)을 가꾼다
고사리손으로 돌 캐던 석계(石溪) 모교(母校)
솔방구리 난로 가에 손 쪼이던 어여린 정(情)
육년간 쌓아올린 차돌탑(水晶塔) 깊은 하늘
그 마당 그 동심이 장작불로 타오른다
서로의 가슴 가슴 속속들이 읽어보며
울고 웃고 싸우고 달래며
돌 중의 돌로 다져 차돌(石英)이 된 얼굴 얼굴
성만리 근용이, 양지마을 장우, 수원
평리에 수근이, 상동마을 영관, 무수
녹동에 상훈이, 물탕골에 정복, 경순
천마봉(天馬峰) 홀로 앉아 때 기다린 시래(時來) 대곤
망부석(國大夫人) 품고 키운 차돌밭 수정꽃(水晶花)들
차돌은
차돌은
희고 든든하고 청결하여
백과석(白石 石)이요
돌 중 영걸(英傑)이라 석영(石英)이며
스스로 갈고 닦아 도(道) 이루니(結晶) 수정(水晶)이다
그 면면(面面) 모두
빛 발하니
삼정승(三政丞) 육조판서(六曹判書)라
그 아홉(九英傑) 힘 합하니 천하가 산 아래다
아 치술 토함( 述吐含) 차돌 빛이
동아(東亞: 東夷民族)에 찬란(燦爛)하다
망부석 1
―죽어 버린 태양이여
치술령
망부석 위에
꽃사슴 한 마리 울어 울어
그 날 그 때 이후부터
한 결 같이 울부짖는다
의인을 돌로 치고
정의를 칼로 자르고
진리를 생매장해도
밤의 권력 앞에 타협하는
태양을 향하여 오늘도 절규하며 울부짖는다
토함산이 울리도록……
나라 위해 가신 임은
오직 한 마음뿐
서라벌 내 조국에 자유, 평화, 행복, 사랑
심자는 것이었소.
그런데 이 어이 내 자녀가
내 이 젊은 꽃다운 계절이
멍들고 병들어 죽어야만 하오리까
해맑은 물결 연초록 풀(草)결 흐리고……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목련꽃 백향이
천지에 진동하여 꽃동산을 이루고
새들이 노래하며 벌나비 춤추고
토끼 사슴 뛰고 놀며 꽃둥이 새둥이 뒹굴어도
털끝 하나 상(傷)치 않는 유토피아 원시림(原始林)
그 계절과 그 터전이
우리의 계절, 우리의 땅이 아니었소
그대 태양이여 말해 보시오
그대 태양이여 말 좀 해 보시오!
힘의 창도에 죽어 간 원한의
선혈이
저 하늘에 저대도록 번득이며 흐르는데
그대 태양은 누굴 위해 존재하오?
오늘의 태양은 죽었소
밤의 권력과 타협하는 배신자요
더 이상 그대는 존재치 않으리라
우리에겐
우리 함께 새 하늘을 열고 새 땅을 이루어
영원한 진리의 태양을 중천에 모셔 놓고
천천 만만 영원토록 자유 안에서 살렵니다
망부석(望夫石) 위
꽃사슴은
오늘도 하늘 우러르며
슬피 운다
치술령
온 산천 흔들리게
참 평화의 계절을 위해 애통하며 절규한다
죽어 버린 태양을 향하여……
망부석(望夫石) 2
내물 왕자 미사흔(未斯欣)아
그대 여기 남편 그리다 돌이 된
서라벌 여인의 절조를 보아라
구름아 동해 창공 높이 솟은
저 구름아
이국 땅 낯선 곳 섬나라 왜구에게
형극(荊棘) 중장(重杖) 맞으며 옥체(玉體)를 불태운
충절공(忠節公) 박제상을 보아라
동천에 붉은 구름 솟구칠 때
님이 외친 그 소리
그대 들리느냐?
―서라벌의 여인이여
나라를 위해 울지 못할지라도
그대와 그대의 자녀를 위해 울어라―
아빠가 보고 싶어
엄마 따라 오른 준령(峻嶺)
모녀가 그리움에 흘린 눈물은 참샘 계곡 되어 흐르는데
그대 속 깊은 눈물들의 이 애태움 들리느냐
그래, 어린 것아 아버지는 오신다
암 오시고 말고
동해 중천에 흰 구름 솟아오르면
아버지는 오신다
꼭 오신다
오늘도
망부석 돌이 되어
꼭 오신다고……
세 딸 달래며 돌 되어
우짖는 소리
………………
서라벌의 아들 딸들이여!
조국 통일의 꿈이 반세기를 흐느끼는데
그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느냐
절조(節操) 굳어 <망부석(望夫石)〉 되고
효조(孝鳥)되어 은을암(隱乙岩)에 앉아
오늘도 역시
그래, 아빠는 오실 거다
오시고 말고 오시고 말고……
한반도 높은 영(嶺)에
당신과 나의 귀여운 자녀 데리고
이렇게 서럽도록 애타게
돌이 된 채 서서
천년을 기다리며
만년을 기다리며
현해탄 파도를 지켜봅니다
망부석의 애원
기다려 기다려
이토록 긴 세월 기다려도
기어이
그대
오시지 않으시렵니까?
오시지 않으시렵니까?
설한풍 머리 덮쳐도
이내 몸
굳어 있었고
산새가 머리 위에 둥지 치고
알 품어도
이내 몸 굳어 있었고
삭풍에 날린 낙엽
양 뺨 후리치고 천둥 번개
폭우(暴雨) 폭설(暴雪) 퍼부어도
이내 몸 굳었습니다
당신이 오실 그 날까지
이내 몸은 굳어 있으렵니다
현해탄 파도
바라보는 돌 되어 있으렵니다
노래하렵니다
원망의 노래
원한의 노래를
온 산천이 흔들리도록
임 한 번 뵈옵고자 혼신 다해 달렸으나
복호 구해 오신 당신 이미 율포 가셨다니
얼마나 억울한지 울어 지쳐 쓰러지니
장사(長沙)와 벌지지(伐知旨)요
그 열행 기리기 위해
망덕사(望德寺) 되었었네
간신히 몸 일으키어 율포에 당도(當到)하니
임은 벌써 배위에 계셨고
배는 벌써 떠나가네
소리치고 외치면서 한 번만 만나려도
손 흔들고 말없으니 이 무슨 운명인가
충의(忠義)의 죄(罪) 몫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만첩산중 치술령에 가솔 모두 유배(流配)되니
이 얼마나 억울한지 대성통곡(大聲痛哭) 땅을 칠 때
치술( 述) 산신(山神) 나타나서 남편 소식 전하는 말
동천(東天)에 흰 구름 솟구치면 낭군(郞君)님은 돌아오고
동해 상천에 붉은 구름 솟구치면 낭군님은 죽어 온다
동해 물결 멀리 뵈는 치술령에 높이 앉아
임 오실 그날까지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울고 불며 임에게 하소연해도
뿌리치고 떠나가신 임을 그리네
임 떠난 그날부터 바위에 앉아
수천년을 기다리며 못 잊어 우네
애가 타게 가신 님을 기다리면서
망부석 돌이 되어 애달피 우는
이내 몸 생각하사 오시련마는
오늘도 안 오시고 눈보라치네
날만 새면 해질 때까지 바위 위에 기다리다
밤만 되면 바위 아래 정성 다해 기도한다
달밤 3
달빛이
월광곡을 창조했고
월광곡이 베토벤을 창조했습니다
보름달이라
밖으로 나가는 발길
치술령 산 그림자가
밤 정기를 토해
위대한 시인을 창조하려나
언어가
모자라는 시인의 아픔은
화가나
음악가에게 맡기리라
그들이 다하지 못하는 신비로움은
달밤을 이해하는 시인에게 맡겨라
내 정녕 이 창조의
신비를
하나님께 구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전하리라
자화상 7
―돌 하나
차이고 밟히며 구른다 구른다
황금빛 찬란한 빛 토하며 하늘 날던
별 하나
지구촌 한반도 경주땅 돌 개울(石溪) 하늘 닦는 산(山) 아래
때를 기다리는(時來) 산간 벽촌 길가에 돌 되어 구른다
긴 나래 펼친 치술령은
365일 자나 깨나 어머니 따뜻한 젖가슴 그에게 물리며
반석(말씀:로고스)으로 그의 하늘 심고 생명수로
그의 숲 가꾼다
사랑하라 희생하라
착하라 참다워라 아름다워라 그러면 기쁠 것이다
행복할 것이다 모두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차이고 밟히며 묻힐지라도 하늘 날던 본연의 반석
언젠가는 본 빛 발하리
억울하여라 보다더 억울하여라 그리고 차이고 밟혀라
차이면 차일수록 바다 깊어지고 밟히면 밟힐수록 하늘 높아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돌 하나
오늘도 구른다 아직도 구른다
물 11
―삼족대(三足臺)에 앉아서
{맑은 시내 수려한 산 첩첩 있어 족하고(溪山이 足) 휘어청청 밝은 달빛 타고 청솔 바람
사시 불어 족하고(風月이足) 음풍농월(吟風弄月) 벗들과 고성방가(高聲放歌) 시 읊으며 마
시고 취하여도 탓할 자 없어 족하다(吟峨가 足)}
청빈한 선비
삼족정신(三足精神) 죽심(竹心)이 뵈옵니다
오 저……
호조좌랑(戶曺佐郞), 춘추정언(春秋正言) 벼슬 마다시고
운문산(雲門山)벼랑 이곳에다
서원(書院) 이루신 님
가락왕(駕洛王) 후예 김관(金 ) 혈손(血孫) 충효정신
반석 위에 다지신 삼족대
마루청에 앉은 죽심이 뵈옵니다
벼슬길 오르길 재촉하는 관원 향해 외치신 삼족정신,
(내 나이 육십 이 만큼 살았으면 수(壽)로서 족하고
사마시 합격하고 천과 올라 대성 역임하고 고을살이 누린 영화
또 한 족하고
조석상 술 고기 떨어지지 않으니 먹을 것마저 족한데
내 무엇 부족하여 벼슬하기를 동경하리오)
아아 불초후손 여기서 둥지 틀고 선대조 남기신 발자국
따라 밟으며 저도야같이 살았으면 하오이다
선대조 삼족정신 꽃 피우고
저도야 같이 가락금 빛 기둥 되어 중천 밝히며
뫼 키우고 살고 싶소이다
삼현 키운 이 운문의 정기 치술령 토함에 옮긴 후
조석 샘물로 퍼마시며 살고 싶소이다
물 19
―오우(五友)를 만나려면
오우(五友)를 만나려면 산으로 가시오
설선(薛宣)
고산(孤山: 尹善道) 그 곳에 계십니다
새 오우를 찾으시는 분 저 산에 계십니다
술독에 빠진 달 잡고 웃고 있는 시선 이태백도
금강석 갈아 시성(詩聖)된 두보님도
무릉도원(武陵桃源) 청풍명월(淸風明月) 가슴에 안고
천도주(天桃酒) 마시며 오유림(五柳林)에 앉아 껄껄껄
웃고 있는 도연명 선생님도
문전걸식하며 십만송 시(道)를 뿌린 미라레빠님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앉자
나머지 안빈낙도(安貧樂道)로 등천등극(登天登極)한 자
한 분을 찾고 계십니다
타아고르? 괴테? 릴케?
시는 좋으나 안빈낙도에 낙제점
코리아 경주 땅 토담집 미루나무 그늘 통평상에 앉아
반석(磐石)갈던 야인(野人)
치술령과 토함산 정기 모여
하늘 도와 시인된 죽심(竹心) 보입니다
그 소리 듣고 하늘땅이 불 밝혀
그를 지켜 바라보는데
그는 이태백(空間)이었고
그는 두보〔물〕였었고 그는 미라레빠〔걸레〕였었고
그는 도연명〔벚꽃〕이었습니다
네명의 천인 모두 한결 놀랍게도 자기보다 한 배 높다하거늘
그는 술 아닌 성령에 취해 시를 쓴다 하더이다
그 한 분을 만나려면 저 산으로 가시오
코리아 경주 치술령 토함산을 찾으시오
그곳에 그 신선이 있습니다
뫼 1
―초동(初冬) 일모(日暮)
해질녘 초겨울 빛 주어 볼까 올라보니
남산은 타다 못해 먹물로 엎어지고
하늘 멀리 치술령 꿈 꽃으로 찬란쿠나
회오리 결 바람맞은 억새꽃 불탄 노을 별 하늘 돋아나는데
작별 설은 잎새들, 부둥켜안고 뒹군다
가고 옴 내 뜻 아니고 피고 짐 내 탓 아닌데
날 잡고 후리치며 이 아우성이냐
자연(自然) 이치(理致) 하늘 조화 아아 저 거대한 수레바퀴
영생불멸 근원 짓밟힌지 오래인데
난들 어쩌라고 난들 어쩌라고
지고 샘 막을 장사 없으니 우리 참고 살아보자
효심 익힌 토함 석불 불심 잡고 굳었는데
너 지금 뿌린 생명 말씀 약속된 새날 오면
부활 환생 해가 되어 지지 않고 봄 밝힐 줄 누가 아느냐
연두 싹 분다홍꽃 온 산천 휘감아 돌며
벌 나비 산새 불러 가무풍악 높이면서
환희천(歡喜天) 불러올 줄 누가 아느냐
토함아 으악새야 우리 그때 깊이 안고 해 낳고 달 기르며
영생불멸 행복의 탑 높이 쌓고 깊이 살자
토함아 으악새야
토함아 으악새야
뫼 3
―60년대 천마봉기상도
내고향 경주 외동 석계리 마파람 잠긴 하늘
외롭게 말씀 열고 계시로 허공 찌른 천마봉
관문성 만리성 넥타이 두르고
경주 울산 한 중심 아득히 홀로 빛 솟은 산
뫼자락 마주 물고 곱게곱게 곤지 찍고
화사롭게 웃음 피운 꽃 진달래 파도소리
싱그러운 방초(芳草) 물고 우야 무야 노래하며
천곡소(牛) 물탕골소 달천소 시래소 어울려
자유 풀던 평화골 여름 정경
울긋불긋 갈바람에 초목백과 춤출 때
선조님 뫼신 묘지 앞에 지성으로 상 올리고
마음 바쳐 경배한 후 흰 최복(衰服) 도포자락 접어 올리며
활(弓)처럼 둘러앉아
아이 불러 떡 나누고 길손에게 술 권하며
조상 덕담 주고받는 미풍양속 가을 풍경
하얗게 쌓인 설편 뽀도독 밟으며
새벽달 옆에 끼고 겨울 깔린 숲속 길로 정상 향해 오를 때면
높새 하늘 토함산은 오색안개 품으며 하얀 말씀 내리고
하늬고개 치술령 소리개로 날아 앉아
날 잡고 입 맞추며 해동 정기 품어 준다
자지러진 백설 두 깃에 가득 싣고
온 즈믄 골 무시 위에 달빛을 반사하는 마하늬 아득한 하늘가
독수리로 날아 앉은 영축산 저 멀리선 가슴 열고
무시로 날 기다리는 정상에는
울산 있다 경주 있다 통도사 있다 불국사 있다
새벽마다 그 곳 올라 별 잡고 불 토할 때
아름들이 바다가 사방에서 터지고
산모의 요란한 빛이 치술령 깃에 안겨
자지러지게 웃음웃는 순희(荀釐) 얼굴이 된다
지금도 잊지 못해 60년대 머금으면
천마봉에 즈린 향내음이 콧속에 파고들어
하늘 닦는 내 마음에 기상도를 그린다
뫼 4
―영취산(靈鷲山)이여 영취산이여
해 닦고 달 씻는 한 신선
웅장한 독수리 기상에 넋 잃고 서서
불법에 잡혀
겨울 하늘 머금고 산으로 앉아
피안의 저 세계 향하여 몸부림치며
산 벗어나려
산 벗어나려
두 나래 파닥이며
창공 나르려 몸부림치는 날카로운 저
독수리 부르짖음 듣는다
날아도 날아도 제 자리에 앉은 새인 채
산으로 산으로만 피고 진 계절
속 깊은 전설 안고
마갈타국 왕사성 석가모니 대법설(大法說)
무량법화(無量法華) 재현하려
인연의 탑 세우고 화엄신장 모시면서 지금까지
모든 정성 다했지만
아 둥우리 둥우리마다 깨어난 생령들
부처의 광영(光榮) 찾을 길 없고
개소리 닭소리 소 울음소리
강산 흔들고 있으니
어느 날 어느 시에 해 닦고 달 씻어
본연의 모습 되어
산은 산으로 앉고 새는 새로 하늘에
날아가려나
영취산이여 영취산이여, 너 이제
인연의 법망에서 해탈하여
두터운 업장(業障) 십자가(十字架)에 내어 주고
본연의 삶 찾아 자유 속에 살았으면
자유롭게 살았으면……
땅은 아직도 땅으로만 앉아
인연 잡고
잃어버린 하늘 찾지 못한 채
왕사성 천년 꿈 낙엽으로 흩어지며
무상의 회오리 물구비로 일렁일 뿐
양산은 양산으로만……
수천 세기 이루려던 불국정토 지금껏 이루지 못한
통도사 깃에 안고 왕사성 그리고 있는
영취산이여
영취산이여
뫼 7
―보리밭(1)
치술령 구름 위에
三冬 푸르름
물결로 가물가물
흐르고 있네
흐르고 있네
하이얀 이불 헤집고
파아란 아지랑이로 솟아오른
하늘대는 4계절 숨결
내 마음 속 아득한 구름 위로
아련아련 있네
꿩 노루 사슴 토끼
여린 순 뜯고 놀던
언덕배기 이랑밭
진달래꽃 한 움큼 쥐고
풀결 파도 쓰다듬고
웃고 선 순희 얼굴
아아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아아 지금은 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구나
찾을 길 없구나
서라벌의 죽(竹)빛 울림 3
―첫닭 소리
어두움 쪼아먹고 자란 올빼미가
반딧불 두려워 허공을 본다
하늘 가득 깊이 쌓인 두려움의 눈망울이
골 즈믄(千) 번 죽어도 풀리지 않을 검은 먹물 뿌리며
헤아릴 수 없이 펼쳐진 저 많은 누리의 눈빛
소망의 절규로 무수히 박혀 있다
태양은 어저께
바다에 빠진 채 떠내려가다
첫 닭 우렁찬 훼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치술령 햇살 두 손을 한사코 움켜잡고
안간힘 다하여 토함산 오른다
새벽을 몰고 훼치는 닭소리
6천년 먹물로 출렁이던 그 이부자리 뜯으며
썩은 고기 즐겨 먹던
올빼미
서라벌 뒷간에서
오욕육정(五慾六情) 토한다!
아! 아!
천지개벽 광명의 새날이
서벌의 토함에
열리고 있다
열리고 있다
내 유년의 천마봉 2
―그 시절 천마봉엔
날마다 새벽 별빛 짊어지고 오르면
치술령 토함산 따라 오른다
따라 오른 토함과 치술 하늘에
빛 사다리 펼쳐 놓고 날 기다리는 분 있었으니
그 분은
곧 말씀(詩)이었다
그 빛 타고 새벽마다
동해에 뛰어든 나는
검푸른 유리 파도 헤집고
저 밑바닥에 빠져 있는 해를 찾아서
몸에 묻은 먹물을 닦아 내어 동천(東天)에 띄웠다
찬란한 빛부심
그는 곧 한 편의 시였다
삼백육십오일 빈손으로
내 유년의 천마봉엔
종교보다도 진한
스승보다도 높은
펄럭이는 깃발로 앉은 동해가 있었다
삼백육십오일 빈손으로 올라가도
삼백육십오일 한 짐 가득 새 하늘을 채워 주는
동해가 있었다.
돈 받고 가르치는 스승이
돈 받고 가르치는 스승이
어찌 하늘 알리
돈주고 배우는 제자가
어찌 가슴을 알리
새벽마다
새벽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정령(精靈)들은
빈손으로 올라온 나만 잡고
수천 수백 스승이 되어 가르친다
가슴 속에 새벽 영기(靈氣: 生靈) 심으며
나는 그 즉시 신선이 되어 태양을 토해낸다
매일 매일
천하가 그 빛에 밝게 탄다
피꽃 무지개 하늘에 어린다
오렌지빛 정수가 터져 장미꽃 파도로 출렁인다
만물의 머리 쓰다듬으며
수천 수만의 오로라 그 빛
그 가슴에 꽂힌다
만상이 모두 해(詩)가 되어 하늘 위로 오른다
너희들은 새벽마다 학교에서 배워라
나는 새벽마다 산으로 가서 해(太陽)가 되리다
산의 아픔 Ⅰ
산이 된 후 나는
지금껏 아프다
산으로만 살자 하는데
하늘이 오라 하고
하늘 가고자 하니
바위(石版: 磐石:말씀)가 발목 잡는다
안개 꽃 눈구름
무지개 숲 불꽃 비(雨)
기암(奇岩) 절묘(絶妙) 금강산(金剛山)
선남선녀(仙男仙女) 첫사랑 탑(塔)
그런 산이 된 나
지금껏 아프다
산위에 앉아
바다를 떠나
아침안개로 산으로 가서
풀숲 반짝이는 이슬로 맺혀
마음은 구름 되어 하늘에
몸은 물이 되어 바다에 보내고
나는 수풀이 되어 산으로 남기로 했다
내가 산위에 앉으니
하늘과 바다가 덩달아 산위에 앉았다
나는 땅을 하늘로 만들 꿈을 꾸면서
천리공사(天理公事)를
그들과 의논한다
그때까지
산위에 앉아
땅을 씻기로 약속했다
하늘 바다 깔고 앉아
산을 올라가면
나는 점점 작아지고
하늘과 땅 바다는 점점 더 넓어진다
정상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도 땅 하늘도 내 곁에 앉아 나를 잡는다
하늘은 바다에 빠진 산을 안고 내노라 하고
바다는 하늘에 잠긴 산을 안고 내노라 하고
산이 된 나는 하늘과 바다를 깔고 앉아 으하하하 웃었다
바다에 빠진 하늘을 본다
하늘에 잠긴 바다를 본다
마음과 몸이 싸운다
마음은 하늘을 훨훨 날아가자 하고
몸은 바다에 풍덩 빠져 헤엄치자 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하나된 수평선을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온 우주가 내 눈 안에 있었다
눈을 뜬다 온 천하가 내 눈 아래 있었다
나는 산이 된 채
하늘 땅 바다를 깔고 앉아
매일 매일 웃었다
간판이란 단어를
새벽 닭 소리가 나를 깨우면
여름이면 지게 지고
겨울이면 망태 매고
세상 모두 적(敵)이다
나는 항상 혼자다
밤이면 빙판(氷板) 위에 알몸
물 한 바케스
입술을 깨물면서 기합 넣고는 또
그까짓 간판 때문에 내가
왜 울어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면서
좋다
나의 사전에 간판이란 단어를 완전히 지우리라
가슴을 달아 주는 학원
내고향 시래 마을 갓골 속에
가슴 달아 주는 학원 있었다
산 속 토담집 방문 열면
삼사월 진달래 한방 가득 웃고
오뉴월 아카시아 꽃 밤(栗) 오동(梧桐) 향
칠 팔 구 시월 칡 싸리 매밀꽃 향
온 방안 가득
밤이 되면 고을 아이 몰려와 고성방가 떠들고
긴 밤 지새우며 옛 얘기 꽃 피웠다
시래에서 가장 작은 두칸집 내 집앞
삽짝문 열고 나가 생명샘 마시면
국대부인(國大夫人) 치술모( 述母) 팔 벌리고 날 부르고
울타리 버드나무 나처럼 싱싱해라
물 초록 잎 피워 하늘 메우고
신선 바람 마시고 낮잠 자는 나 깨우려
사방의 매미 불러 합창시킨다
이십일년 땅속서 굼뱅이로 살았노라
이십일년 두엄 속에 딩굴며 살았노라
내집 뒷산 만리성(萬里城:관문성 줄기) 천마산 오르면
세상은 모두 내 것 원시시대 밥그릇
바다 속으로 흐르는 강 오색안개 토하는 신선
머리에 가슴 단 시인
첫 사랑 미이라 Ⅰ
옆집 순(筍)이
건너 마을 숙(淑)이 서로 다투어
미소로 달음질치며
라일락 향기
백합화 가슴 시이소로 저울질하던
그 시절, 나는
무형의 피라미드 하늘에 쌓노라
잠 못 이뤄 누운 채 방문 여니
엘도라도 입에 문 황금빛 보름달
감나무에 걸터앉아 손짓한다
4월 동산 5월 들판
어루며 쓰담던 밤바람
아카시아 꽃향기 한 아름 싣고
나 홀로 방안에 우루루 몰려와
어서 일어나라 목덜미를 잡는다
홀린 듯 비몽사몽 후닥닥 일어나
부모 몰래 사립문 고이 열고 나가니
약속한 바 없는데도 내 사랑 순(筍)아가
새벽닭 회치며 노래할 그 時까지
우물에 빠진 달 건지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살금살금 고양이 된 나는
말없이 순아 곁에 살짝 앉으니
한 마리 새양쥐 되어 포르르 떨었다
'어마마 오빠가!'
치술령 하늘엔
달 꽃이 만발하고
견우직녀 가슴 은하수를 건넜다
말없는 가운데 사랑은 불탔고
볼 수 없는 사랑 속에 열매는 익어 갔다
아 아
첫 사랑 미이라여
그 젊음 그 행복
지금도 여전한데
어느덧 이마 위엔 실개천 내리고
돼지털 머리칼에 흰 눈발 흩날린다
아 아 그것은 추억 속의 미이라
허공 중의 뜬 구름
잡아본들 잡히지 않는 무지개꿈 꽃 안개다
입술 깨문 갑돌이는 너를 떠나 2,30년
추억(追憶)이 미이라 되어 흐를수록 새롭구나
그래 이젠 너와 나
그 추억 묻고 살자 한 가슴 깊이깊이
우리 그만 묻고 살자
아 아 첫 사랑 미이라여
그 젊음 그 행복 지금도 여전한데
어느덧 이마 위엔 실개천 내리고
돼지털 머리칼에 흰 눈발 흩날린다
너와 나 헤어진 후
아들 딸 모두 키워 저렇게 꽃이 피니
하늘이 맺어준 인연(因緣) 줄(線)
따로 따로 있나 보다
이재 우리 그 줄잡고
남은 세월 깊이 살자
청산 가는 그날까지만
너와 나 따로 살자
천명 다해 청산 가는 날
너와 나 누에 되자
오색 비단 풀고 풀다 힘이 다해 쓰러질 땐
우리 함께 굳어지는 쌍고치 되자
하얗게 빛부신 쌍고치 되자
틀어 안고 단꿈 씹는 백산(白山)이 되자
아 아
쉰 해를 치닫는 파뿌리에도
열 아홉 푸른 순정 새순으로 돋나보다
회춘(回春)의 열병인냥
사랑불에 타는구나
목전에 쉰을 둔 초로(初老)인 내가
장미 꽃 강물에 헤엄치고 있다니
이 무슨 망령이며 파렴치한 치매(癡 )더냐
아 아 첫사랑 미이라여
그 젊음 그 행복 지금도 여전한데
어느덧 이마 위엔 실개천 내리고
돼지털 머리칼에 흰 눈발 흩날린다
매화(梅花)
파아란 하늘 우러르며
연분홍 연지 입술마다 바르고
함초롬히 내 안 마당 뜨락에 앉아
상큼한 향기 날리며
날 유혹하는 너는
숨결마다 그리움 물고 오는
첫 사랑 순희 입술
몽오리 몽오리 연분홍 눈송이로
미소 방울 하늘에다 수놓으며
송올송올 유화(乳花)로 맺혀
그리움 머금고 웃는 너는
기다림의 마디마디마다
소망을 싹틔우는
은빛 고운 순희 가슴
동해야 말해 보아라
시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눈
시를 느낄 수 있는 깊은 정
시를 찾아 잡을 수 있는 심오(深奧)한 기지(奇智)
시어(詩語)를 찾아서 신처럼 천지를 시로 창조할 수 있는
그런 가슴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라면
아름답지 않는 사물 고귀하지 않는 생명 그 어디에
시인의 가슴과 세상 사물의 맨 가슴이 그러할진대
시인의 가슴과 시인의 가슴이 마주한 그 자리에서야
천지 우주 삼라만상 소화시켜
한 편의 시 속에 농축시킬 수 있는
아 아 그런 가슴을 가진 시인과 시인끼리라면
얼음(氷)이라도 불붙지 않으리
썩은 돌이라 하더라도 피가 끓지 않으리
동해야 말해 보아라
시인의 가슴이라면
동해야 나는
나의 은사님이
너 품에 한쪽 발만 담그시고
천지를 삼킬 듯 큰소리치며
밀려오는 파도와 주고받는 말씀을 들었다
「내 한쪽 발바닥 씻기도 비좁은 너 따위 태평양 가지고서야……」
「아니올시다 아직 나만큼 큰 사대양(四大洋)이 더 있소이다」
「오대양(五大洋)이 넓다……고?
육대주 현 인류의 때(垢)를 씻기에도 부족한데
하물며 육천년 지은 죄를 어찌 다 씻겠다 덤벙대며 촐랑대는가
어리석은 동해야」
나는 여쭈었다
「은사님 시인의 가슴이면 어떻겠나이까」
「시인의 가슴이라 그렇지 시인의 가슴이라면 가능하리라
진정(眞正)한 시인의 가슴이라면……」
내 다시 하늘 가면
동해야
내 다시 하늘가면
지구성을 새로 지으리다
바다는 바다로만 살고
강은 강으로만 살고
샘은 샘으로만 살게 하는 지구성을
내 다시 하늘에 올라가면
산은 산으로만
들은 들로만
하늘은 하늘끼리만
살게 하는
나라를 가꾸리라
다시 하늘에 올라가면
하늘과 바다와 산과 강이 함께 살아도
다시는 아픔이 없고
슬픔이 없고 괴로움이 없는
그런 하늘을 만들리라
동해야
동해야 나는 안다
동해야 네 깊숙한 그 가슴이
왜 그렇게 시퍼렇게 멍들었는지 나는 안다
동해야 네가 밤낮
왜 그렇게 진저리치며 아우성치는지 나는 안다
동해야 네가 밤낮
왜 그렇게 하늘을 가슴에 담고 그리워하는지 나는 안다
산소 호흡기(呼吸器)만 떼어버리면
금방이라도 죽을 뇌사당한 대륙을 천번 만번 씻고 또 씻은
그 피고름 묻은 죄악의 시신 가슴에 담고도
늘 푸르게만 썰렁이는 동해
그 깊은 가슴 하늘된 것을 나는 안다
속 태우며 뒹굴며 발버둥치며 발악하며 검붉은 피를 토하는 동해
외면하는 하늘의 뇌성벽력(雷聲霹靂)
이유 없이 당하기만 하는 동해
저주받은 동해 버림받은 동해
아 어머니된 그 가슴을 나는 안다
왜 그처럼 출렁이며 밤낮 요동치는지를 나는 안다
동해가 노(怒)할 때는
동해는
자주 노한다
공연하게 나를 향해
하늘 병(病) 들었다
구름 때(垢) 묻었다
노한다
산이 아니면서 산인 듯 앉았다고
회오리 물칼(銀粧刀)로 도려내자 솟구치고
메아리 세척제(洗滌劑)로 씻자고 함성(喊聲)이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살(肉) 잘라
그 욕망 채웠고
골(骨:谷) 깎아 그 야심 채워 주었다
입술 깨물면서
허기진 동해
채워도 채워도
입벌리는 동해
주어도 주어도 허기진 듯 출렁이는 동해
그때 이후
지금껏
산은 출혈한다
뼈가 저리도록
씻으려고만 하는 동해
창세 이후 씻으려고만 한다
필사적으로
강을 씻고 대지(大地)를 씻고
산(山)마저
휘몰아치고 기진맥진 허겁지겁 덤벼들며
지상의 모든 것
더러운 독한 죄악까지도
천년 만년
천번 만번
때리고 부수고 어르고 달래면서
씻으려고만 한다
마음뿐인 동해
끝내는
단 한 번도 저 산 저 들
씻지 못한다
.
동해야 네가 말했지
동해야 네가 말했지
학교에는 일월(日月)만 차면 주기마다 시험을 치고
종이로 만든 졸업장을 주지만
산에는 일월(日月)만 차면 주기마다 새 옷을 주고
계절로 만든 새 마음을 준다고
동해야 네가 말했지
졸업장은 종이 위에 인쇄(印刷)된 글자로
불붙으면 재가 되지만
계절의 새 옷은 삼라만상 위에 맺혀진 영롱한 가슴으로
불붙으면 한 편의 시어로 영글은 영원한 생명이 된다는 것을
동해야 동해야 네가 말했지
졸업장은 성현(聖賢)은 물론 인자(仁者)조차도 낳기가 어렵고
자연은 사성(四聖)도 낳았고 인자도 낳았다고
그 누가 알리오
혹시나
동해는 바보다
백암(白岩) 청석(靑石)
황금 조약돌
백사장(白沙場)만 씻는 동해는 바보다
더 이상 씻을 것도 없는
얻은 것이라곤 피멍뿐이던데
그래도 씻자고 미치는 동해
때(垢)도 없는 참모습을 가루가 되도록 씻는
동해는 바보다
과대망상
과대망상인 줄 모르고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산을 부숴버리겠다고
산의 때를 씻고야 말겠다고
호통치는 동해
씻으려고만 하는 저 동해는
시(詩)다
파도야
늘 푸르게 춤추고 늘 찬란하게 부서지는 네가 좋아
늘 시원하게 열려 있는 네 가슴이 너무 좋아
내 이렇게 너울너울 너 품에 잠겨 춤춘단다 너를 따라
내 안 뜰에는 네가 없다 사시장철 창문 열고 너 보고 살고파도……
내 뜨락에 너를 심어 밤낮 잠겨 살려 한다 너 속에서
만경창파 등을 치니
파도가 산으로 와서 우우우 우아하하
네 아무리 천하(天下) 문재(文才)요 시성(詩聖)이라도
안뜰에 심겠다고 어찌 나를
나의 깃털 한 올 자르지 못할 자가
진정 네가 나를 갖고프면 이부자리 짊어지고 내 품으로 오라
내게 안겨 나와 함께 춤추며 즐기고 사세나, 순진한 시인아
무지한 파도야
악을 쓰며 애써 거품 토하는 만경창파야
내가 네 주인임을 어찌 모르느냐
시(詩)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비가 한 마디씩 옮긴 것이요
말씀은 곧 위의 두 어른과 아래의 두 어른이 한 입으로 하신 말 아닌가?
네 아무리 큰소리쳐도 한 편의 시어로 창조된 바다의 예술일 뿐
어찌 감히 나(詩人)에게 비기려 드느냐
지금 비록 나를 안고 웃음 조각 휘날리며 유혹할지라도
내가 시가 되듯 너도 시가 되면 그때엔 내 뜨락에 나와 함께 살리라
너울너울 시가 되어 춤추는 파도로
시인아 시인아 내 안 저 속 저 풍경 보이느냐
저 산 저 들 저 바위도 내 속에 잠겨 춤추고
저 달 저 별 저 구름도 내게 안겨 발가벗고 몸 비비고
저 청천 저 노을도 내 속에 잠겨 저렇게 그리움 불태우며
저 광명한 저 태양도 내 품에서 때를 씻어 저토록 저렇게 찬란한데
너 진정 시를 아는 시인이라면 이 장엄한 나의 조화(調和)에
잠길 줄 모르단가 어찌하여
파도야 파도야 잔말 말아라
그러기에 내 너를 아주 잡아 내 안마당에 심으려 하지
더 이상 잔말 말고 내 안뜰로 가자
내 안뜰서 시(詩)로 태어나 영원토록 춤추는 파도가 되라
새생명(新生命: 詩語)신선한 바다로 춤추는 내 뜰의 시어가 되어
영원토록 함께 사는 파도가 되라 읖파파하 팦파도야
그 나라에 가고프다
수평선아 수평선아
내 너에게 그렇게 시인의 뜨락에서 춤추는 파도로 남아 달라 당부했거늘
그래도 너는 날 잡고서 그렇게 이 바다에 함께 살자 했었지
하지만 이제 더이상 여기 머물고 싶지 않노라
더이상 변질된 이 짠물을 마실 수는 없노라
새벽바람마다 향기가 소멸된 바다
하늘 구름마다 생명 비(生命雨) 사라진 이 곳에서는
수평선아 수평선아
태양은 바닷물에 빠져 소금기에 찌들은 채 더이상
하늘의 빛이기를 거부하고
달 별은 흑암 물고 밤새 눈물을 흘리면서도
스스로 동경(憧憬)의 대상되기를 거부하는 오늘
말씀으로 푸르게만 살던 산이 슬프고
진리를 따라 순종으로 살아왔던 물(江)들이 아프다
너에겐 시(詩)가 있어도 하늘을 심어 키울 대지가 없다
사랑의 노래와 환희의 춤이 있어도 감사함을 주워담을 그릇이 없다
아 아 수평선아
새벽 향기 싱그러운 수풀 동산에 무지개꽃 찬란하고
칠색 말씀 잎새마다 새들 노래 영롱(玲瓏)히 맺힌 나라
거리거리마다 형형색색 시가 되어 영생화(永生花)로 피어 웃고
수풀 수목(樹木) 가지마다 오색시(五色詩) 생금(生金)으로 맺혀
찬란히 영그는 나라
어여쁜 사라상(砂螺床)에 고운 시(詩)만 차려 놓고
삼시(三時) 세끼 진수성찬(珍羞盛饌) 즐겨 먹고 사는 나라
내 어서 시가 되어 그처럼 살고프다
수평선아 수평선아 그 나라에 가고프다
회춘(回春) 7
―정축년 첫 하늘에
丁丑年(1997년) 첫 하늘에
十有五而志乎學時節의 추억이 구른다
너희들은 모두 간판을 따거라
나는 산에 가서 하늘을 따리라
새벽부터 해 구름 마주하고 싸우더니
점심 때 이르러 폭풍우로 돌변했다
천마봉 서편 가파른 산비탈에 폭풍에 날린 나뭇짐
구르고 있다
비에 젖은 깐디 그를 보고 외친다
루소야 칸트야 링컨아 뭣들보고 있느냐 저 나뭇짐 잡아라
예수야 공자야 소크라테스야 너희들 그렇게 힘이 없었더냐
먹구름 갑자기 몰려온다
허겁지겁 동여맨 나뭇짐 짊어지고
가파른 경사진 길 올라왔다
쏟아지는 그 땀 닦기도 전에
몰아친 폭풍우에 날린 나뭇짐
오늘도 천마봉 서편 기슭에 구르고 있다
한나절 시린 손 눈물을 닦는다
배고픔 갈증이 동치미 국물 그린다
아 아 하늘이여 제게 무얼 원하나이까
나는 기필코 내 하늘을 얻으리이다
14시가 다 되도록 넋 잃고
울어 울어 에이더니 매섭던 북서풍 하늘 열고
때 씻은 태양을 안겨 주었다
비에 젖은 빈 지게 위에는
짙푸린 내 하늘이 가득 실려
두칸집 사립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물긷던 순희
그 모습 보고는
속울음 울고 사라질 때
그때서야 왠지도 내 눈에서도
뜨거운 강물이 솟구쳤다
정축년 초하루 변덕진 하늘이
속울음 울던 순희 내 곁에 또 보냈다
회춘(回春) 2
낙엽이 세월에 흩날려 딩구른다
낙엽이 그리움 안고 딩구른다
지천명(知天命)의 계절이 응어리 안고 딩구른다
아쉬움의 지호학(志乎學) 야심찬
눈망울 굴리던 그 추억에 빠진 채
사랑에 젖어 웃던 그녀의 검은빛 눈동자
보이지 않는다
아침노을에 젖은 장미빛 정겨운 그녀 얼굴
보이지 안는다
고웁디고운 그녀의 아릿다운 몸매
어디론가 사라지고 찾을 길 없다
아 그녀가 딩구르고 있다.
새파란 불꽃 젊음에 빨간 꿈, 가슴에 세긴 채
저기 저기서 딩구르고 있다
그녀가 뒹굴고 있다
진한 그리움 핏빛으로 삭이며 가을이 되어 딩구르고 있다
봄 꽃나무에 여름 숲, 가지로 자라난 그녀
갈잎 열매로 노오랗게 익어간
그녀의 자리 자리
그리움 토하는 깜찍하고
새까만 눈동자 빛이 난다
짜릿짜릿 깨물고픈 그녀의 영글은
앵두빛 그 매혹의 입술이
나를 오라 나를 오라 부르고 있다
아 순희가 딩구르고 있다
순희가 여기 저기서 딩구르고 있다
까르르 웃다가
흑흑 느끼다가
와르르 떨다가
나밖에 없다던 그대여
나 이렇게 사노라고
이 생 저 생 같이 웃자고
울리며 달래던 그대여
나 이렇게 멍이든 채
지천으로 뒹굴며 울음울고 사노라고
아 아 그 화살 맞은 나는 가을을 앓고 있다
첩첩이 쌓인 미련을 꿰뚫고
사랑의 정수리에 꽂힌 채
미친 춤(狂躁)을 춘다
첫사랑 화살 춤춘다
산은 산이되 그 산이 아니며
강은 강이되 그 강이 아니니
오 주여 어쩐담 오 주여 어쩐담 이를 어쩐담
네가 피멍으로 지천이 되니
나는 응어리로 냉가슴 앓는다
깊은 가을을 앓는다
깊이 깊이 앓는다
회춘(回春) 3
낙엽이 세월에 흩날려 딩구른다 그리움 안고
지천명(知天命) 계절의 응어리가 딩구른다
아쉬움 지호학(志乎學) 야심 찬 눈망울이
그 추억의 사랑에 젖어 웃던 흑진주 눈동자가
아침노을 장미빛 정겨운 그녀 얼굴이
보이지 안는다 보이지 안는다
고웁디고운 살구꽃 살결 아릿다운 나나니 몸매
사라진 꽃구름 찾을 길 없다
아 나나니가 딩구르고 있다
연두빛 금파란 떡갈닢 4월의 꿈,
가슴에 새긴 날나리 그녀가 딩구르고 있다 여기 저기서
진한 장미빛 그리움 토하는 저녁 노을
핏빛 가을 두둑에
내 살점 여기 저기서 딩구르고 있다
봄 동산 진달래꽃 여름 벌판 버들숲 가을하늘
감홍씨로 익어온 그녀는
겨울 솔숲 흰눈된 백두루미
내 깊고 높고 넓은 마음은 노오랗게 멍든 가랑잎
깜찍한 흑진주 눈동자 빛난다
짜릿짜릿…… 깨물고픈
그녀의 영글은 앵두빛 그
매혹의 입술 아로새긴 담배 연기다
아 아 그녀가 부른다
나를 오라 나를 오라 부른다
아 내 사랑 그녀가 딩구르고 있다
내 소중한 눈동자가 저기 저렇게 딩구르고 있다
까르르 웃다가 흑흑 느끼다가 와르르 떨다가
나밖에 없다던 그대의 나 이렇게 떨어져 사노라고
이생 저 생 같이 웃자고 울리며 달래던 그대의 나
이렇게 멍이든 채 지천으로 뒹굴며 울음울고 사노라고
외친다 외친다
외치고 있다
그것은 뜨겁게 불타는 화살이었습니다
폐부를 관통하는 독화살
아 아 그것은 날벼락
그 화살 맞은 나
그 즉시 가을이 된다
첩첩이 쌓인 미련을 꿰뚫고 사랑의 정수리에 꽂힌
화살 맞은 나는 가을이 된다
그 가을이 춤을 춘다
첫사랑의 독화살 가슴에 안고 춤춘다
산은 산이되 그 산이 아니며 강은 강이되 그 강이 아니니
오 주여 어찌 하오리이까 오 주여 어찌 하오리이까
이를 어찌 하오리이까
네가 피멍으로 지천이 되니
나는 응어리 냉가슴
가을을 앓는다
가을의 가을을 깊이 앓는다
석청(石淸) 교장선생님
40여 성상(星霜)
달고 오묘한 생명 말씀 가슴에 뿌리며
산과 들 강과 바다에 그 숲 가꾸어 오신
석계의 한줄기 빛
오
석청* 신용범 교장선생님
치술령 참샘 물먹고 자라
박제상(朴堤上家) 충효의열 4절(忠孝節) 저려있는 말씀되어
앉으나 서나
발걸음 걸음마다에 그 씨 뿌리니
천천 만만 형형색색 묘목(苗木) 자라 숲 되고
계절 따라 꽃 피우며 열매 익힌다
그러리라
이제 그 숲에
천만(千萬) 종(種) 생(生)**이 몰려 노래하며
봉황알만 둥지 틀고
날로 날로 키가 자라 산(山)을 쌓아 가리라
그 깊은 석청향(石淸香) 산지사방 날리니
그 향에 도취된 벌나비떼 몰려와
춤사위 말씀 나래로 잔치 펼치며
석청의 본향(本鄕) 석계(石溪)*** 학교를
위대한 교육자 탄생시킨 학교로 높이리라
그렇다
석청은
스스로 가장 낮은 곳에 앉았으나
가장 높은 산으로 치솟아 하늘을 머금은 스승으로 남으리라
*석청(石淸):야생벌이 물어 뭉친 진짜 꿀을 두고 말하나 이 시 속의 석(石)은 석계의 石,
즉 반석이신 말씀(로고스)을 뜻하고 달고 오묘한 생명의 참 말씀을 청(淸)이라 했다. 석청
은 곧 生命 이요 길(道)인 감로(甘露)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다.
**생(生):鳥와 숨쉬는 모든 동물.
***석계(石:반석, 말씀,道,로고스):溪:산곡 속에 흐르는 샘물 本鄕의 情, 谿, 磎. 성서에
서 마귀(魔鬼)는 반석(磐石:말씀: 로고스:道)이신「예수」를「돌」이라 칭하고 그 돌을 떡
덩이 되게 하란 시험을 했다. 예수는〈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에서 나
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장 1-11)했다
♣ 연락처 :
경주시 마동 76-9번지 7/3
☎ (0561) 746-3495
재생하기 바로보기가 지원되지 않는 파일입니다. 클릭하여 팝업창으로 플레이 해보세요. 재생하기 바로보기가 지원되지 않는 파일입니다. 클릭하여 팝업창으로 플레이 해보세요.